"이 사달의 시작은 윤 대통령의 '입'에서부터였다" -카이스트 동문
그녀가 주는 가장 큰 낯섦은 폭력 앞에서, 그리고 폭력과 직간접적으로 관련된 '사회적' 금기 앞에서, 도무지 두려움이 없는 점이다. 과거의 어떤 이유로 경찰을 불신하는 그녀는 모든 문제를 자기 손으로 처리하는 길을 택하는데, 그 과정 하나하나가 만일 경찰에 신고했더라면 강간 '피해자'로서 그녀가 어떤 사회적 시선을 겪어야 했을지 역으로 환기시킨다. 그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강간은 강간이고 따라서 처벌받아야 한다는 건 바로 그녀 자신이 심판하는 주체였기 때문에 지켜진 원칙이며, 이 심판을 그토록 주도면밀하게 진행할 수 있었던 힘은 무엇보다 그녀가 두려워하지 않는 인물이라는 데 있다.
얼마 전 행정자치부가 어이없게도 출산지도라는 이름으로 '가임기 여성수'라는 항목을 만들어 셈한 일이 많은 이들의 분노를 샀다. 아이들을 낳고 오래 보살피는 일, 그들이 독립적으로 살아가는 것을 지켜보고 돕는 일 모두가 행복하고 보람있어야 하며 또 긴밀히 이어진 하나의 과정일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궁극적으로 우리 모두의 삶이 행복하고 보람있는가 하는 차원과 관련되어 있기에 여성만의 일일 수는 더더욱 없다. 그런데도 이런 유의 몹쓸 헛발질이 거듭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다른 헛발질들이 그렇듯이 이 역시 문제가 실재하고 따라서 아무것도 안할 수는 없지만 정작 해야 할 일은 절대 하지 않으려는 데서 나온 결과로 보인다.
'소박하고도 진실한' 이 가족 이야기를 보며 오히려 가족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에 정신분열적인 데가 있음을 새삼 깨닫는다. 가족을 추켜올리는 시도는 가족의 수난을 은폐하거나 예고한다. 쉽게 가치를 부여하면서 쉽게 내팽개치며, 해체의 위협을 가하고 있을 때 가장 숭배를 바친다. 무엇보다 우리는 가족을 공동체의 원형으로 소환한 다음 곧장 공동체의 실패를 떠안겨버린다. 공동체와 가족의 실제 관계는 정확히 그 반대다. 공동체가 가족의 원형이며 가족의 고난은 공동체의 실패를 보여주는 증상이다. 그러니 사회적 삶의 문제를 더는 가족에게 미루지 말아야 하며 그 무거운 짐으로부터 가족을 내버려두어야 한다. 특히 '남아 있는' 가족들에게는.
다른 많은 것들이 그러하듯 우리 사회에서 말의 자리 또한 안전과는 거리가 멀었다. 청산되지 못한 역사를 맴돌며 죽음을 모독하는 숱한 망언처럼, 밝혀지지 않은 진실을 비웃듯 바닥을 드러내며 뒤집힌 채 선내방송은 아직도 되풀이된다. 아이들이 철이 없어 위험을 감지 못했다는 특별조사위원회 청문회에서의 어느 해경의 말로, 생각하는 습관이 없어서 사고를 당했다는 어느 교수의 말로, 정말 가만히 있었네,라며 거듭 되돌아오고 있다.
진짜 무력한 것은 어느 쪽인가. 법질서의 안정은 법질서보다 무력하며 민주주의의 수호는 민주주의보다 무력하며 혼의 정상화는 혼보다 무력하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목표로 내건 바를 결코 수행하려고 하지 않기 때문이다. 문제가 아무리 심각하고 근본적인 해결이 아무리 요원해 보이더라도 야금야금 잠식하는 예외상태를 우리의 미래로 받아들여서는 안될 이유가 여기에 있다.
2022년 프랑스 대선에서 이슬람 정당의 후보가 대통령으로 당선되는 가상적 상황을 그린 미셸 우엘벡의 『복종』은 마침 이슬람 테러리스트들이 빠리에서 『샤를리 에브도』 지(紙)를 공격한 1월 7일에 출간되어 관심의 초점이 된 바 있다. 해가 바뀌기도 전에 빠리에서 다시금 경악스러운 테러사건이 벌어진 상황에서 이 소설은 존재 자체로서 스캔들이 되기에 충분한 듯 보인다.
10월 초 창비 부설 세교연구소 임원급의 문학비평가와 며칠 여행을 같이 하게 됐던 한 친구의 말에 따르면, 당시 창비 핵심으로부터 그 비평가에게 창비와 백낙청을 옹호하라는 '오더'가 수차례 떨어졌다고 한다. 놀랄 일 아닌가? 아마도 그에게만 그 일이 일어나지는 않았을 것이다. 창비의 창비스러움은 처음엔 백낙청 개인의 권위주의적 성격 때문에 불거졌지만, 이젠 그 개인을 넘어 창비라는 조직이나 진영의 신뢰와 관계된 문제가 되었다. 작가는 사과하고 뒤로 물러났는데, 정작 창비는 사과하기는커녕 오히려 자신의 조직을 지키라는 지침을 보냄으로써 소위 공부하고 글 쓰는 사람들을 조직원으로 여기고 있음이 드러났다.
신경숙과 문학권력에 대한 비판자들이 자신의 동기를 달성하기 위해 필요한 자비의 원칙을 지켰는지 의문이다. 신경숙의 작품 전체가 형편없다는 견해는 신경숙 작품들에 대한 그간의 비평과 대중의 반응을 고려하면 신빙성이 떨어진다. 명성을 얻었고 작품 수도 많은 작가들이 대개 그렇듯이 신경숙 또한 걸작과 졸작을 모두 생산했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 그런 작가가 한두 작품의 몇몇 구절에서 표절로 판단할만한 치명적인 잘못을 저질렀다면, 그 점에 근거해 그의 작품 전체를 쓰레기라는 듯이 발언하기보다는 왜 그런 일이 발생했는지 분석해봐야 한다. '상습적 표절,' 그러니까 도벽이 있다는 식으로 간단히 해석해치우는 것은 자비의 원칙에 입각하면 받아들이기 어렵다.
의도적 절도로서의 「전설」이나 상습범 신경숙을 단정했다가 그간의 논의를 통해 '의도'를 가정한 비난이 부적절하다는 점을 새삼 발견한 것이라면 스스로 그러한 비난에 얼마나 동조했는지도 솔직히 밝히는 게 옳다. 또한 그동안 신경숙의 '의도적 베껴쓰기'를 인정 안한다고 창비에 퍼부은 공격은 어찌되는 것인가. 창비가 다른 많은 것을 더 했어야 한다는 비판은 마땅히 감수해야 하겠지만 창비의 '묵언'과 '입장표명'은 '의도'에 대한 단정을 근거로 한 작가를 매장하는 일에 가담할 수 없다는 것이 아니었던가. 신경숙의 사과에 대해 대다수 비판자는 의도적 베껴쓰기를 자백하지 않았으므로 진정한 사과로 받아들일 수 없다는 공격을 계속했으며 창비의 머리글이 계속해서 비난받은 것도 같은 맥락이었다.
신경숙과 문학권력에 대한 비판을 극단적으로 정형화시켜 놓고, 그 논리에 문제가 있다면서 창비의 입장을 정당화하는 것은 설득력도 없고 아름답지도 않습니다. 당신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비판자들은 훨씬 다양한 입장을 가지고 있습니다. 저만 해도 이응준 소설가가 신경숙 표절을 지적하던 바로 그날 페이스북 댓글에 "이 글로 신경숙 작가의 수작까지 매도할 필요는 없지만, 저는 당연히 표절이라고 생각하고 이에 대한 분명한 문제제기가 필요하다고 봅니다."라고 쓴 바 있습니다. 이런 입장이 김종엽 편집위원의 주장대로 신경숙 "작품 전체를 쓰레기"로 보는 건지 묻고 싶습니다. 창비가 이러한 프레임을 깨지 않는 한 어떤 생산적인 논의도 이루어지기 힘들 겁니다.
자비의 원칙을 논하려면 남들에게 그 원칙을 들이대기 전에 김종엽 혹은 창비는 자신들에게 먼저 그 원칙을 적용해야 한다. 김종엽은 "신경숙과 문학권력에 대한 비판자들이 자신의 동기를 달성하기 위해 필요한 자비의 원칙을 지켰는지 의문"이라고 불평하지만, 그 말은 그대로 창비에게 되돌려 줄 수 있다. 창비는 그동안 비판자들의 비판에 대해 "필요한 자비의 원칙을 지켰는지 의문"이다. 비평에서 자비의 원칙은 중요하다. 그렇다면 본질적인 비판의 원칙은 어디 갔는가.
2014년 깐느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받은 누리 빌게 제일란(Nuri Bilge Ceylan) 감독의 영화 「윈터 슬립」(Winter Sleep, 한국개봉 2015.5)이 다루는 문제는 결국 '얼마나 살아 있는가'라는 질문과의 대면이라 보고 싶다. 더 정확히 말하면 이런 대면을 피하는 방식이 얼마나 여러가지인가 하는 것이다. 삶과 정면으로 만나는 일은 곧 자아의 욕망과는 또다른 '살아 있음'의 요구를 듣는 일이므로 마치 신탁과도 같은 엄중한 사건일 수밖에 없다. 따라서 실상 우리 대부분은 때로 오만하게, 때로는 겸손하게, 때로 허위로 또 때로는 정직으로 어떻게든 그 사건을 비껴가고 싶어하는 것이다.
'희망'이라는 말과 마찬가지로 '사람다움' 역시 한층 풍성한 삶의 지평을 지시하기보다 더이상은 떠밀릴 수 없는 절벽을 연상시키는 점이 한국사회의 정직하고도 부끄러운 좌표이다. 소송의 탈을 쓴 린치에 다름 아닌 손배가압류라는 신종 폭력은 공공의 정치를 난폭하게 짓밟으며 강화되어온 노골적인 돈의 정치를 대표한다. 불과 며칠 전, 진상규명을 저지할 목적이라 볼 수밖에 없는 세월호특별법 시행령을 내놓으면서 보상금이 8억이네 11억이네 운운한 것과 정확히 동일한 성격의 폭력인 것이다.
문제의 해결은 정확히 그 반대방향이어야 한다. 비정규직이 되어도 살 만할 때만 정규직의 삶이 안정될 수 있으며, 실업자가 된다 한들 버텨낼 만해야 비정규직의 삶도 개선될 수 있다. 누구든 정규직이 될 수 있다는 말과 누구든 실업자가 될 수 있다는 말 가운데 어느 쪽이 더 현실적인 진술인지 생각해보면 알 수 있는 일이다. 복지에도 '낙수효과'란 없으며 우리의 삶이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건 이런 의미로 해석되어야 한다. 바로 지금 어느 누구의 삶도 위태롭지 않으므로 나 또한 어떤 일이 일어나도 견딜 만하리라 확신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불안을 해소하는 궁극의 방법이며 삶의 연대가 시작되는 출발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