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신춘문예 시 부문 당선작이 표절 논란 끝에 당선 취소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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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휘자, 작곡가 등이 바뀌는 건 그러려니 할 수 있다. 하지만 그 과정이 지저분해서 울화가 치밀어 오른다. 그동안 다져온 자산을 유지하고 향후 더 발전하는 방향으로 이끌어가기는커녕 어떻게든 흠집을 내기 위해 공로를 무시하고 위업을 폄훼하기 일쑤다.
몇 달 후 홍 위원이 직접 전화를 걸어 블로그 글을 내려달라고 요청했다. 홍 위원은 이때 이 교수가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며 거듭 사과했다고 논설에 썼으나 이 교수의 이야기는 다르다. 그는 블로그 글의 내용이 틀렸다고 인정하거나 사과한 적은 일절 없다고 한다. 그 사과는 자신의 글이 2만 회 이상 조회되는 와중 의도치 않게 상처를 줬을 수도 있다는 데 대한 미안함에 관한 것임을 밝혔다
현역 시절 아사다 마오는 꽤나 억울하게 조리돌림당한 적이 있다. 바로 인터뷰에서 '억울하다(悔しい, 쿠야시이)'라는 표현을 자주 썼기 때문이다. 김연아에게 지고서 그리 말할 때마다 한국 언론은 기다렸다는 듯이 그걸 제목으로 뽑아서 보도했고, 한국 대중 또한 기사를 대거 공유하며 아사다를 힐난했다. 결과에 승복할 수 없다, 편파판정이 의심된다 등으로 느껴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는 오해다. 우리말 '억울하다'에는 부당한 이유로 안 좋은 일을 겪은 상황이 전제돼 있지만 일본어 '悔しい'는 반대다.
또 하나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직장인 혼밥이 늘어가는 양상 이면에는 '강요되는 소통'에 대한 거부감이 자리하고 있다는 점이다. 자연히 이는 젊은 세대가 주로 겪는 고충이다. 대화나 소통을 빌미로 자기 이야기나 생각만 늘어놓는 '꼰대'가 연장자나 선임자라면 정말이지 미칠 노릇이다. 지인의 말을 빌리자면 차라리 그런 사람이 자폐에 가깝다. 혼밥 문화가 그토록 우려된다면 '너희가 극복해야지!'라고 말할 게 아니라 함께 식사하기를 꺼리게 만드는 또 다른 문화를 비판하고 개선하는 게 어떨까 싶다. 이런 사안에서 개인을 문제시하는 사람과 밥을 먹으라면 난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혼자 먹는 길을 택하겠다.
리카르도 무티의 지휘료를 두고 논란이 일고 있다. 경기 필을 두 차례 지휘하면서 받는 돈이 3억 원 가까이 된다는 게 알려졌기 때문이다. 단독 타이틀 걸고 기사를 낸 한겨레는 '베를린 필의 사이먼 래틀도 회당 5천만 원(2009년 기준)인데 이 무슨 혈세 낭비냐?'라고 말하는 모양새다. 난 한겨레에 하나만 이야기해주고 싶다. 이런 사안을 이야기할 때 기회비용을 싹 걷어내면 논의가 매우 미흡해진다고. 알다시피 클래식 음악의 주요 무대는 유럽과 미국이다. 거기서 활동하는 유명 음악가가 아시아 동쪽 끝에 자리한 한국에서 연주 활동을 하기 위해선 치러야 하는 대가가 아주 크다.
내가 중식당을 고르는 기준은 매우 단순하다. 여러 중식당이 보내온 광고지의 메뉴를 죽 훑어보며 글자 서너 개만 찾는다. 바로 덴뿌라 또는 고기 튀김이다. 메뉴에 이게 있으면 기본을 갖춘 중식당으로 간주해 거기에 주문을 넣는다. 내 경험에 따르면 이는 꽤 타율이 높은 방식이다. 의외로 탕수육만 알고 덴뿌라는 모르는 사람이 많다. 간단히 설명하자면 탕수육에서 소스가 빠지는 대신 반죽 자체에 짭조름한 간이 된 음식이다. 제대로 반죽해 잘 튀기면 어지간한 고급 요리 이상으로 맛있어서 나는 꽤 좋아한다.
우리는 '인권의 과도기'를 살고 있다. 우리가 속한 사회에는 이런 사안에 둔감한 이가 민감한 이보다 여전히 많은 게 현실이고, 이 글을 쓰는 나 또한 큰 틀에서 보면 크게 나을 것 없다. 난 마마무 측이 특별히 무지했다기보다는 우리 사회의 분위기가 투영된 쪽에 가깝다고 본다. 비판을 통해 사회 전반에 경각심을 고취하고 점차 개선되는 방향으로 전개되는 건 바람직하다. 그러나 이때다 싶어 육두문자 섞어가며 조리돌림하는 건 그리 좋게 보이지 않는다. 심지어 그들이 걸그룹이란 이유로 이리저리 비하하면서 그러면 더욱 거시기하다. 소리 높여 정의를 말하는 행동을 통해 자신이 얼마나 불의한 사람인지를 노출하는 격이랄까.
DJ DOC의 가사를 두고 여혐 논란이 불거졌다. 이를 두고 내가 특별히 할 말은 없다. 마음으로만 응원할 뿐 광화문에는 나가지 않고, 또 여성 권익을 늘 성찰하며 사는 군상도 아닌 내가 무슨 할 말이 있겠나. 슬쩍 숟가락 얹는 꼴밖에 안 되겠지. 문제의식엔 공감하나 그 귀결이 배제(불참)가 아닌 교정(가사 수정)이면 더 좋았을 것 같다는 정도만 소심하게 피력한다. 하지만 이 논란이 일종의 '자격론'으로 변질되는 흐름에는 단호히 반대한다. DJ DOC의 과거 행적과 이미지, 심지어 힙합 필드 전체를 들먹이며 '이딴 놈들이 어디 감히 끼어?'라는 식의 견해를 공격적으로 펴는 걸 말하는 것이다. 이건 분명 여혐과는 별도의 논제다.
당사자들은 이런 게 한두 건이 아니라 일상이라고 전한다. 지인은 다음과 같이 첨언한다. 그런 일을 겪는 동안 주변 문인 중 누구도 주의를 주거나 말리지 않았다고. 다들 그런 걸 암묵적으로 동의 또는 방관하는 분위기였다고 한다. 연대하겠다는 의사를 표명한 이들 또한 비슷한 사례를 적잖게 알고 있을 텐데 차마 발설하지 못하는 느낌이라고 말했다. 다시 말해 알 만한 사람은 다 알지만 쉬쉬해온 오래된 일이란 뜻이다. 낭만, 권태, 퇴폐 등의 단어로 그럴싸하게 치장된 문학판의 속살 내지 민낯이다.
조심스레 추측하건대 이 건에 대해서도 많은 유명 작가들은 입을 다물 것이다. 유난히 발 넓기로 유명한 박범신이니 다들 어느 정도 친분을 갖고 있을 것이고, 그 역시 소위 문단 권력의 정점에 있는 사람 중 한 명이니 괜한 구설수에 오르고 싶지 않을 것이다. 일전에 내가 써서 기고한 글을 그대로 인용하자면 우리 사회는 '문제를 제기하는 이를 문제시하는 문제 사회'여서 누구나 자기 분야에선 몸을 사리게 마련이다.
며칠 전 김영란법의 여파로 세계적인 악단의 내한공연 티켓이 평소보다 현저히 싼 2.5만 원에 대거 풀리며 한바탕 예매대전이 일었다. 가격이 하필 2.5만 원인 것은 그래야 두 장을 선물해도 5만 원을 안 넘어 김영란법에 저촉되지 않기 때문이다. 한데 이를 두고 잘됐다며 통쾌해하는 목소리가 은근히 들린다. 요약하면 '솔직히 너무 비싸니 이참에 거품 좀 빠져라!', '공짜로 비싼 초대권 팍팍 뿌려대더니 꼴좋다!', '누군 돈 내고 보고 누군 초대권으로 보고!' 등이다. 보통의 소비자 입장에서 볼 때 충분히 이해되는 불만이다. 하지만 그 이면의 이야기까지 알면 약간은 달리 보게 될 수도 있다.
주요 문학 공모전의 요강을 보면 대부분 '다른 데 이거 응모하면 안 돼! 걸리면 너 아웃임!'이라고 명시되어 있다. 난 이걸 이해할 수 없다. 문학은 수학 등과 달라서 정답이 없고 일관된 잣대로 평가할 수 없다. 여기선 대차게 까여도 저기선 쪽쪽 빨릴 수 있는 게 문학이다. 중복출품을 허용해야 한다. 대신 수상을 통보받을 경우 자신이 출품한 다른 모든 공모전에 즉각 그 사실을 통지하는 것을 의무화하는 정도의 장치를 마련하는 게 어떨까 싶다.
2014년 9월 중소기업중앙회에서 일하던 계약직 여성 권 씨(향년 25세)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권 씨가 남긴 유서와 이메일에는 정규직 전환의 희망 아래 24개월간 성희롱과 부당한 대우를 참아온 사실이 빼곡히 담겨 있었다. 사건이 언론에 보도되고 국정감사에서도 거론되며 2014년 11월 중기회는 관련 간부들을 해임하고 면직했다. 그러나 그들이 겨우 4개월 만인 2015년 3월에 복직됐고 성폭력 용의자들 또한 모두 증거불충분 무혐의 판정을 받았음이 최근 보도를 통해 뒤늦게 드러났다. 책임지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다시 말해 없던 일이 돼버린 것이다.
때려 부순 건 당연히 잘못한 일이지만 작가가, 그것도 도발적인 방식으로 뭔가를 말하고자 했던 작가가 그를 두고 처벌이나 책임 운운하는 건 그다지 현명하지 않다는 소견이다. 본인의 메시지를 스스로 희석시키는 것처럼도 보인다. 한편으로는 일베를 향한 사회의 강력한 우려를 고려할 때 그 정도 반발은 예상할 수 있는 범주 안에 있지 않았나 싶기도 하다. 그걸 때려부수지 않을 만큼 우리 사회 구성원들 간에 관용이 가득했다면 애초 일베는 탄생하지도 않았을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