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 먹는다고 다 어른이 되는 게 아니다.
감정들과 씨름하느라 하루가 다 가버리는 식이다.
사람들의 입에 재갈이 물려 있다
새로 이사한 집 위에는 마포대교가 있고, 아래에는 한강이 있다. 나의 방은 반지하인데, 반지하에서 사는 것은 이번이 두 번째다. 4년 전에는 반지하의 창문에서 들리는 발자국 소리와 자동차의 불빛에 신경을 곤두세워야 했지만 지금 지내는 곳은 창문에서 쇠창살과 회색 담장만 보인다.
나는 많은 유아인'들'을 만났다. '너에게 배우고 싶다', '너의 글이 너무 좋아'라며 접근한 의미 중독자들. 남성 인간 주체의 주체뽕, 예술뽕, 해탈뽕은 고질적이다. 그래서 그들은 페미니즘에 끌렸을까.
우리는 서로를 비혼·비출산 가족, 연인, 도반, 짝꿍 등으로 그때그때 이름 붙이지만 어느 것으로도 가두지 않는다. 서로가 원하는 거리에서 원할 때 함께 있고, 따로 있는다. 매일매일 달라지는 몸의 바이오리듬처럼, 관계도 가깝다가 뜨거웠다가 차가웠다가 멀어졌다가를 반복하는 불규칙한 리듬이다.
누구나 나의 책을 읽었으면 좋겠지만, 마음의 준비가 안된 사람들은 안 읽어도 좋다고 생각한다. 다만 나의 이야기가 자신의 이야기처럼 가닿을 사람에게는 꼭 닿고싶다. 이 책은 아홉살 때부터 길거리 성추행을 당하고 열세살에 자위를 하고 열네살에 야동을 보고 열다섯살에 첫경험을 했던 내가 나에게 보내는 편지이기도 하다. 집에 돌아가기 싫어서 도서관을 어슬렁가리던 나에게 말이다.
내가 동양인, 황인종, 한국인, 여성, 20대, 비영어권 인간이라는 것은 이 소통의 공간에서 중요하지 않다. 코즈모폴리턴, 절대적 환대와 세계시민의 가능성은 여기에 있는 것 아닐까. 우리에겐 더 많은 언어능력이 아니라, 더 많은 무지가 필요할지도 모른다. 나는 당신을 모른다는 무지.
하루 종일 인터넷을 붙잡고 있다. 예술인복지재단 창작지원준비금 신청을 하려고 오전 10시부터 눈 뜨자마자 컴퓨터 앞에서 지금까지 씨름 중이다. 사이트는 폭주해서 다운되고, 전화를 해도 통화 중이고, 메일을 보내도 답장이 없다. 그 돈이라도 받으려고 아등바등 컴퓨터 앞에 앉아있는 나와 다른 사람들의 모습이 상상된다. 오늘을 위해 일주일간 건강보험증도 발급받고, 겨우 건강보험 납부확인서도 받아내고, 소득이 없다는 사실증명 등 서류도 준비했는데... 내가 지금 뭐하고 있는 건가 싶다.
나와 다른 방식으로 듣고, 보고, 느끼는 존재가 옆에 있다. 이 존재를 완전히 이해하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모든 타자가 그렇듯. 커리에게 나는 어떤 움직임일까. 인터넷에서 '강아지가 좋아하는 음악'을 검색해봤다. 레게음악이 좋다고 한다. 아침마다 레게음악 플레이리스트를 틀어놓았다. 커리가 정말 좋아하는 것인지 잘 모르겠다. 커리는 취향이 없을까? '인간이 좋아하는 음악'이 덩어리로 있는 게 아닌 것처럼, 커리가 좋아하는 선율과 리듬이 있을 거다.
'성판매 여성 안녕들 하십니까' 페이스북 페이지는 성노동자가 자신의 이야기를 쓰고 있는 공간이다. 얼굴 없는 사람이 얼굴을 드러낼 수 있는 고맙고 반가운 곳이었다. 그러나 얼마 전 페이스북 코리아는 이곳을 음란물 페이지로 규정했다. 많은 사람의 항의로 다행히 규제는 풀렸다. 창녀의 추억 따위가 남성 작가의 문학작품으로 나오고, 영화마다 화려한 배경으로 창녀가 등장하는 땅에서 창녀가 자기 목소리로 자기 이야기를 하는 건 음란물이 된다. 성노동자는 스크린 속의 미학이거나 환상 속 악마, 팜파탈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어쩌려고 했어요?" 인도에서 만난 한국 남자가 내 어깨의 타투를 보고 말했다. "왜요? 이게 뭐 어때서요?" "여기서는 괜찮은데 한국 가면 어쩌시려고요." 그의 무례한 걱정만큼 한국 사회에서 여자가 하는 타투는 편견을 몰고 다닐 수 있는 일이다. 타투는 내 의미를 각인하는 것인데 어떤 시선에서는 낙인으로 돌아온다. 타투가 범죄자의 낙인이거나 종교의 부적이던 역사는 길다. 나에게 타투는 낙인이라서 부적이다. 편견이 많은 사람을 막아주는 방패랄까. 타투 덕분에 '여자가 타투를 하면 싸 보입니다'라고 말하는 사람과 인연이 닿지 않아서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