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시험, 엘리트 선발 제도의 승리자들은 대체로 입시형, 고시형 인간이다. 가정이나 학교에서 시험 점수에 들어가지 않는 정의감, 공감 능력, 도덕성을 학습할 기회가 없었다. 일제 식민지 이후 지금까지 한국의 교육과 시험 제도는 자신과 가족의 이익을 위해 권력에 복종하고, 땀 흘려 일하는 사람을 얕잡아 보며 주변의 고통에 둔감한 이런 인간을 길렀다. '가문에는 영광', '국가와 사회에는 재앙'이었다.
솔직히 나도 자신 없다. 만약 내가 서울대를 졸업하고 검찰에 들어가 부잣집 딸과 결혼할 수 있다면, 나름 정의의 검을 휘두르며 기업·정치인들을 줄줄이 기소할 수 있다면, 나의 지조와 신념은 돈과 권력 앞에 눈 녹듯 녹아내릴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래서 두렵다. 16년이라는 세월 동안 무한경쟁에 내몰려 끝내 그 승자독식의 법칙을 내면화하고 마는 학생들이. 오늘도 집, 학교, 학원을 오가며 성공만을 위해 질주하고 있을 젊은이들이. 강용석을 존경하고 이희진에 열광했던 그대들이. 설령 그렇지 않더라도 사회가 정해놓은 기준에 따라 숨죽이며 살아야 하는 우리들이 말이다.
호박에 줄긋는다고 수박이 되지 않는다. 검찰의 대통령조사방침을 접하면서 과거 박지원대변인의 명언이 떠올랐다. 마찬가지다. 박근혜의 검찰이 사상최초로 현직대통령을 조사한다고 해서 본질이 바뀌지 않는다. 정치검찰이 국민검찰로 바뀌지 않는다. 국정원댓글개입 수사, 십상시 수사, 성완종 리스트 수사 등 숱한 대형국면마다 진실과 정의를 왜곡하며 국민이 준 검찰권을 남용해온 부역죄가 덜어지지 않는다. 만약 지난 1주 동안 광장참여가 떨어지고 정권지지가 반등했다고 가정해보라. 검찰조사결과는 보나마나 '역시나'였을 게 불 보듯 뻔하다.
최순실 의혹에 대한 고발이 접수됐지만 검찰은 한 달간 꿈쩍하지 않았다. 미르·K스포츠재단 인허가 과정을 감사해야 할 감사원도, 최씨 일가 탈세 의혹을 조사해야 할 국세청도 움직이지 않았다. 다들 대통령의 입만 바라보고 있었다. "이게 나라냐"는 물음은 대통령과 최씨뿐 아니라 국가기관 모두를 향하고 있다. 문제는 오히려 비정상적인 일들이 놀랄 만큼 잘 돌아간 데 있었다.
한국 학교에는 지식교육만 있을 뿐 성교육, 정치교육, 생태교육이 없다. 한 인간이 개인으로서, 시민으로서, 생명체로서 살아가는 데 기본이 되는 교육은 방기하고 있다. 지식의 습득만을 절대시하는 '학습기계'가 성숙한 인격체로 성장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오히려 최고의 학습기계는 최악의 괴물이 될 위험성이 높다. 우병우, 진경준, 홍만표, 나향욱 - 한국 교육이 키워낸 최우등 '괴물들'의 적나라한 비루함은 오늘 우리에게 교육혁명의 절박함을 증언하고 있다.
대한민국에서 '견제와 균형의 원리'가 전혀 작동하지 않는 국가기관이 있으니 바로 검찰이다. 대한민국 검찰은 직접 수사를 하거나 경찰의 수사를 지휘하는 주재자의 권한, 기소여부를 온전히 혼자 결정하는 기소독점권을 가지고 있다. 국가형벌권의 사실상 유일무이한 담지자인 셈이다. 뿐만 아니라 대한민국 검찰은 온갖 국가기관에 검사들을 파견해 고급정보를 수집하고 의사결정에 관여하는 엄청난 권한을 누리고 있다. 이런 어마어마한 권한을 가지고 있다면 당연히 검찰을 감시하고 견제하는 국가기관이 있어야 마땅하다. 하지만 그런 국가기관은 없다.
조선 말, 나라의 운명이 풍전등화일 때 '시험 귀재'들은 '탐관오리'가 되어 사회를 타락시킨 장본인들이었고, 을사보호조약, 한일강제병합 당시 나라를 팔아먹은 대가로 일제의 작위를 받아 호의호식하였다. 일제 하 고등고시 합격한 조선인 거의 전원은 동포들의 학대하는 일제의 하수인 역할을 했고, 군사정권 시절에는 고시출신 대다수는 반민주 반인권 권력의 마름 역할을 했다. 이게 개인 탓일까, 제도 탓일까? 나는 제도 탓이라 본다.
"회사에서 잘나가는 분들 보면 극우 성향을 거침없이 드러내요. 야당은 종북 좌빨이고 노조 같은 건 없애버려야 한다고... 그래야 인정받고, 출세한다는 걸 알고 일부러 저러는 거 아닌가, 생각이 들 정돕니다." 대기업에 다니는 한 직장인의 증언이다. 생각은 머리가 아니라 일상에서 나온다. 교육부 간부가 '1% 대 99%'로 나눈 건 신분제가 자신의 이익에 부합하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