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겔이 왜 국어 영억에서 나와??????
국회의원의 지위를 이용해 산하기관에 자신의 "시집"을 카드 단말기까지 의원실에 갖다 놓고 팔았던 이가 이제 북경의 "시인" 노영민이 될 판이라니, 역시나 마르크스가 헤겔을 빌어 『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 18일』에서 얘기한 대로 역사는 한 번은 비극으로, 한 번은 희극으로 반복(?)되는 모양인가 싶어 쓴웃음마저 난다.
100미터 남짓한 이 아담한 거리에 유태인을 추모하는 황동판이 무려 36개나 심어져 있는 것을 보고 경악했다. 이 아름답고 평온한 거리가 아우슈비츠와 연결돼 있다는 사실이 비현실적으로 여겨졌다. 일상에 불현듯 틈입한 역사에 아득한 현기증을 느꼈다. 매일 집 앞에서 아우슈비츠를 만나야 하는 독일인의 심정이 궁금해 한 중년 여성에게 걸림돌이 주는 심리적 부담감에 대해 물었다. 돌아온 답은 뜻밖이었다. "마땅히 짊어져야 할 부담입니다. 우리는 지금 과거와 만나는 새로운 방법을 배우고 있습니다."
불행히도 좌파 자유주의의 공적 영역 또한 갈수록 트위터 문화의 규칙들에 지배되고 있다. 짧은 글, 톡 쏘는 대꾸, 냉소적이거나 화난 논평이 지배적일 뿐 다단계의 논지 전개는 설 자리가 없는 것이다. 글의 한 대목(한 문장 또는 문장의 일부)을 잘라내서는 그에 대응하는 식이다. 이런 트위터식 대응을 지탱하는 입장은 자기 정당성과 '정치적 올바름' 그리고 잔인한 냉소주의의 결합이라 할 수 있다. 무엇이든 문제적인 발언이 감지되는 순간 자동적으로 그에 대한 대꾸가 발사되는데, 그것은 대체로는 상식적 수준의 '정치적 올바름'에 입각한 대응이다.
지난 몇 주 성가시리만치 문재인 정부의 새 내각 인선을 둘러싼 청문회가 이어졌다. 새 정부의 중요한 직책을 맡게 될 인물의 면면을 헤집고 고발하면서 적임인지 아닌지 시비가 뜨거웠다. 정치적으로 큰 역할을 하게 될 인물이, 누가 봐도 본보기가 될 만한 인품을 지니고 있어야 한다는 주장은 그럴듯하다. 그렇지만 이러한 모범적인 인격을 지닌 이들에 의해 세상이 좌지우지된다는 선량한 믿음 속에는 어딘지 구린 구석이 있다. 의롭고 떳떳한 인물을 정치지도자로 뽑아야 한다는 원칙은 그럴듯하지만 정치가 인격에 좌우되는 것이라고 볼 이유는 전연 없기 때문이다.
위장전입 시비는 국회 인사청문회에 맡기고 강 후보자가 오늘의 한국 외교를 감당할 능력이 있는가를 가려 봐야 한다. 피우진 보훈처장처럼 강 후보자도 여성으로서 상징성이 높다. 지금 독일·프랑스·일본의 국방장관이 여성이다. 미국은 두 명의 뛰어난 국무장관을 배출했다. 그러나 한국 같은 나라의 외교는 상징성으로 되지 않는다. 미국·독일·프랑스·일본과 달리 한국은 실존적 안보 위협을 받는 나라다. 강경화 후보자는 유능한 유엔 외교관이었다. 그러나 그에게 고도의 외교 전략과 상상력과 추진력과 철벽도 뚫고 나갈 돌파력이 있는가는 의문이다. 특히 그에게 4강 외교의 경험이 없는 것이 최대의 약점이다. 국내 경험이 일천한 것도 흠이다. 오늘 한국의 외교부 장관은 부총리로 격상해도 손색이 없을 인물이어야 한다.
현재 문재인 캠프가 직면한 위기의 본질은 '적폐 세력'(박근혜, 김기춘 등)이 구속되면서 '적폐 청산'을 주장하는 세력의 정치적 반사이익이 소멸됐기 때문이다. 적폐세력이 사라졌을 때도 같은 컨셉의 선거운동을 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탄핵에 적극 동참했던' 상대 경쟁후보에게도 과거 공포의 동원 전략을 적용하는 것. 그게 바로 '적폐연대론 전략'이다. 이는 결과적으로 안철수를 지지하는 약 35%의 유권자를 '적폐'로 규정한 셈이다. 안철수와 박지원은 군부독재 세력이 아니다. 이런 사람들을 '적폐연대'라고 규정하면 국민들이 보기에는 그저 황당할 뿐이다.
나는 태어나서 학교를 한 번도 다니지 않았다. 초등학교, 중학교, 그리고 고등학교까지. 남들이 걸어오지 않은 길을 걷는다는 사실은 종종 불안을 야기했다. 열일곱, 고등학교 1학년 나이가 될 무렵 이러한 불안은 감당할 수 없으리만치 극심해졌다. 앞으로 무엇을 공부해야 하지? 대학에 가야 하나? 아니, 그 전에 대학에 들어갈 수는 있으려나? 군대는 어떻게 하지? 학벌, 연줄 없이 한국 사회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까? 수많은 의문이 머릿속을 맴돌았지만 모두 공허한 메아리일 뿐이었다.
우리는 박정희와 헤어질 준비가 돼 있는가. 박근혜 대통령은 민심과 국회에 탄핵됐지만 55년 전 쿠데타로 집권한 박정희가 축조한 획일적 국가주의의 앙시앵 레짐(구체제)은 현재진행형이다. 이기적 욕망과 상실의 공포가 교차하는 혼돈의 경계에서는 양심과 정의 대신 복종과 타협을 선택하라고 유혹하는 박정희 패러다임이 예외 없이 작동하고 있다. 박정희는 난공불락이었다. 그와 싸웠던 생전의 김근태는 "한국의 모든 대통령은 18년이라는 무한대의 정치적 시간을 가졌던 죽은 박정희와 도저히 이길 수 없는 싸움을 벌여야 했다"고 했다.
닉슨은 순순히 물러나지 않았다. 박 대통령의 버티기와 판박이다. 닉슨은 국민과 기자들에게 자신은 국가를 위해서 헌신적으로 일했을 뿐 워터게이트는 알지도 못했다고 거듭거듭 거짓말을 해댔다. 거짓말이 거짓말을 낳고 은폐에 은폐가 겹쳤다. 백악관 대변인 론 지글러는 워터게이트를 "삼류 절도사건"이라고 일축했다. 2014년 정윤회 문건 사건 때 청와대가 "찌라시"라고 한 말의 원조다.
역사는 파괴와 새로운 창조가 아니라 연속적인 발전 과정이다. 치욕스런 일제 조선의 역사도 엄연한 한국인의 역사다. 김윤식은 '전천후 세대' 비평가다. 1936년생인 그는 자신 세대의 포로가 아니다. "나 자신의 세대 의식은 없다" 스스로 고백하듯이 특정세대이기를 거부하고 객관적 투명성을 미덕으로 삼은 '구경꾼' 내지는 '방관자'의 특권을 극대로 행사한다.
정당-노동조합-지식인 사회 전체가 '고용안전망-산업구조 고도화-구조조정의 패키지'에 대한 대안적 담론, 대안적 정책, 대안적 정치행위를 준비하지 못했고, 그 결과물로 오늘날 우리가 겪게 되는 것들이 정리해고 된 쌍용자동차 노동자들의 자살, 조선업 구조조정으로 고통받고 있거나, 고통이 예고된 하청-비정규직-정규직 노동자들의 눈물 그리고 서러움들이다. 이에 대해 그간 노동운동을 했던 분들과 진보정당에 속했던 분들은 이 모든 것이 '자본의 분할통치 전략'이거나, 박근혜 정부와 재벌의 책임이라고 돌리는 경향이 있다. 한마디로 '남 탓의 정치학'이다.
선거를 통한 집권, 정당 해산, 노조의 악마화, 행동대의 적극적 활용, 언론 장악, 정치적 반대자들에 대한 겁박 및 적과의 내통가능성 부각, 공포와 위협을 통한 지배, 기본권의 제약, 국가기관의 사유화 등등등. 위에 열거한 일들은 히틀러 나찌의 집권 및 통치기간에 일어난 일들이다. 만약 당신이 위에 열거한 일들을 박근혜 정권이 한 일이라고 해석했다면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는 위독한 상태다. 그리고 불행히도 당신의 해석에 반대하기 힘들다.
끝내 그들 서구 마르크스주의자들 중 프랑스 출신의 대표격이었던(그리고 우리나라에도 널리 소개되었던) 알튀세르는 1980년 어느 날 아내의 목을 졸라서 살해-_-하였음을 고백하고 정신병원에 갇히기까지 한다(프랑스 좌파 중에서도 그의 부인 살해를 쉴드친 이들이 있었을지 갑자기 궁금해진다). 현실과 유리된 고담준론이나 내세우고 최소한의 윤리조차 지키지 못했던 주제에 변혁을 감히 입에 올렸던 어느 이념이 완벽하게 파산하는 순간이었다.
문제는 이런 '무의식적 표절 행위'가 아니라, 문학을 '미문을 짓는 일'로 보는 관점이다. 신경숙 논쟁의 핵심에는 '어디까지가 표절인가' 하는 문제가 아니라, '아름다운 문장을 지어내는 것이 과연 좋은 문학인가' 하는 물음이 자리하고 있다. 신경숙 논란에서 다시 드러난 한국문학의 위기는 미문주의의 위기이다. 문학이 현실의 심연을 도발의 언어로 천착하지 못하고, 단지 그 표면을 아름다운 언어로 치장할 때, 문학은 이 성형의 시대에 감성의 화장술로 타락한다.
세월호 실종자 가족 중 한 분도 이런 말씀을 하셨다는 기사를 본 적이 있다. "우리나라는 '비보호 좌회전' 같은 나라입니다. 정부가 뭘 해주길 기대하면 안 됩니다. 알아서 살아남아야지." 그처럼 알아서 살아남아야 하는, 누구도 나를 돌보지 않는 디스토피아 같은 이 곳을 이 책 《비보호 좌회전》은 성실하고 생생하게 조명하고 있었다. 1970년 와우아파트 참사, 1994년 성수대교 붕괴, 1995년 삼풍백화점 붕괴, 1995년 경기여자기술학원 화재, 1999년 씨랜드 참사, 2003년 대구지하철 방화 참사, 2011년 가습기 살균제 피해 사건, 그리고 2014년 세월호 사건까지. 저자의 표현을 빌리자면 이곳에서 건강히 살아 있는 사람들은 "운이 좋았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