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장애인 중심 사회를 고찰하는 에세이& 첨예한 문제의식과 밀도 높은 서사가 돋보이는 소설집
‘썰’을 잘 푸는 사람에게 자꾸 필요 이상의 지적 권위를 부여하는 방송가의 게으름을, 이제는 그만둘 때도 됐다.
"어둡고 이상하면서도 응집력 있는 이야기가 작가의 탁월함을 보여준다”
최근 논란은 언론이 왜곡한 결과라고 치받았다.
글 읽는 속도를 높여주는 한글 의사 시리즈 12편
동물의 존엄성을 법적으로 인정해줘야 한다는 이야기도 했다.
다양하고 미묘한 이슈를 담담하게 보여준다.
우리의 문학엔 여성혐오가 만연했다
『기획회의』 468호 이슈 ”대중문화 인문학” - 장르문학이라는 새로운 인문학 객체
연재 - 한국 SF 연대기 (4)
이 '약진'하는 '페미니즘 소설'들을 책상 위에 쫙 펼쳐보았다. 흥미롭게도, 책들의 표지에 모두 어깨까지 내려오는 검은 머리 여자들의 옆모습 혹은 뒷모습이 그려져 있었다. '누구지? 이 여자는?' 얼굴을 드러내지 않은 이 여자들은 마치 한 명 같다. 얼굴 없이 홀로 고요한 이 여자가 '지금 여기', 2017년 남한 "페미니즘 소설"의 페르소나인지도 모른다.
산불 장면은 사실적이라는 표현이 무색할 정도로 너무나 생생하게 구현된다. 국립극장 해오름극장의 거대한 무대 뒷벽이 붉은 불길로 일렁이고 진짜 대나무가 가득한 무대로부터 대나무가 불에 타서 쪼개지는 소리가 퍼져나갈 때, 전쟁의 참화(慘火)에 대한 이 재현은 감각적 현실로 육박해온다.
아마도 해방 이후에 출간된 한국문학(일본어로 쓴 한국문학을 포함한)의 가장 중요한 업적 중 하나로 꼽힐 만한 걸작인 〈화산도〉는 한국의 유수하다는 문학출판사에서 출판되지도 못했다. 그리고 작품의 완역본이 몇 년 전 출간된 뒤에도 내가 알기로 주요문예지 어디에서도 제대로 된 평문으로 거의 다루지 않았다. 작가의 성취에 걸맞은 국내의 명망 있는 문학상을 수여하지도 않았다. 아마도 짐작컨대, 일본어로 쓴 김석범 문학은 '한국'문학에 포함시킬 수 없다는 판단이 작용했을 것이다.(그런 점에서 김석범 문학은 역설적으로 한국문학의 경계와 의미를 묻는 역할도 한다)
아름다움은 곧 자신과 세계에 대한 정확한 인식과 파악의 깊이다. 빈약한 사유를 가리는 미사여구를 구사하는 것, 기발한 표현과 문장을 창안하는 것, 독특한 비유법과 상징법을 사용하는 것이 아름다움의 몸체가 아니다. 물론 그런 것들도 포함된다. 말을 갖고 노는 재주는 시의 중요한 구성요소다. 그러나 이런 '언어적 장치'들은 아름다움의 곁가지다. 아름다움은 곧 깊은 앎의 문제다. 미당시는 그런 아름다움에 이르는가. 그렇지 못하다. 나는 한국문학의 큰 공백으로 (문학적) 지성의 빈곤을 지적해왔는데, 미당시도 예외는 아니다. 참된 아름다움은 깊은 지성의 다른 표현이다.
80년대 초반 광주의 진실을 두고 전두환 독재정권과의 전면적 싸움이 벌어지고 있을 때 내가 가장 듣고 싶었던 목소리 중의 하나가 작가 황석영의 그것이었던 것도 그러고 보면 이상한 일은 아니었을 테다. 전태일이 점화한 70년대 노동운동과 민주화투쟁의 새로운 국면에서 황석영이 「객지」 「한씨 연대기」 「삼포 가는 길」 「돼지꿈」 등 일련의 작품으로 그려내고 포착한 민중 현실의 생생한 모습과 포괄적 인간 진실의 힘은 문학의 울타리를 넘어 저항과 변혁의 은밀한 심지가 되고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렇다면 80년대 초 그 급박한 시절에 그는 어디에 있었는가. 황석영의 자전 『수인』은 내게는 꼭 그 질문에 대한 응답처럼도 보인다.
대의민주제가 현실적으로 힘을 발휘하는 대중민주주의 시스템에서 선거와 투표는 주권자가 주권을 행사하는 유일한 방도는 아니지만, 매우 유력한 통로이다. "투표는 탄환보다 강하다"(링컨)라고 말하는 건 분명 과장이다. 그러나 투표의 힘을 과소평가해서도 안된다. 이번 선거에 적극 참여할 것을 제안하면서 내 강의의 수강생들에게 했던 말이다. "여러분이 지지하는 후보에게 투표하라. 최선의 후보가 없으면 차악의 후보를 선택하라. 정치인들은 입만 열면 국민을 말한다. 입발린 소리다. 잊지 말라. 정치인들은 국민 일반에 관심 없다. 그들은 오직 투표하는 유권자만을 두려워한다. 여러분의 목소리를 저들이 듣게 만들려면 투표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