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무사가 1980년대 간첩 사건을 조작할 때 단골로 찾던 '조총련'을 앞세웠다.
최근 인사청문회에서 일부 정당들이 보여준 모습이야말로 시민 없는 대의제의 문제점을 여실히 보여준다. 문재인정부의 인사 과정에서 시민의 참여가 원천 배제되고 있는 것도 촛불 거버넌스와는 거리가 있다. 더구나 청문회 제도의 개선책에서도 시민의 역할이 논의되지 않고 있는 것은 놀랄 만한 일이다. 문재인정부에 시민사회 출신 인사들이 참여하는 것이 '시민사회와의 협치'라고 비꼬는 것도 온당치 않다. 과거 보수정부도 민주정부도 시민사회에서 새로운 인물을 '수혈'받았고, 그러한 수혈의 한계도 여실히 보여준 바 있기 때문이다. 촛불혁명이 요구하는 것은 수혈이 아니라 수술이다.
우리는 함께 해냈다. 추운 겨울을 넘는 일이 간단치 않았지만, 촛불을 들고,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면서 결국 여기까지 왔다. 10월 29일 첫번째 촛불을 들었을 때, 우리는 오늘이 올 것을 알지 못했다. 하지만 '너무 어려운 도전' '불가능한 꿈' '넘을 수 없는 벽'이란 존재하지 않았다. 우리는 촛불의 주장이 이루어질지 걱정하던 이들에게, 민주주의를 회의하던 사람들에게, 대한민국이 민주공화국임을 믿지 못했던 존재들에게 분명한 답을 보여주었다.
혁명의 일차적 성공이 혹시라도 4·19 이후와 같은 변질로 귀결되지 않을까, 또는 87년체제의 단순한 변형에 그치지 않을까 하는 걱정은 어느 자리에서 하든 긴요하다. 그런 점에서 '광장'과 '일상'은 겉으로 보이는 것과 달리 깊이 내적으로 연결되어 있고 그렇게 연결되어 있음을 상시적으로 자각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주말마다 집회에 참석하는 것은 주중의 힘든 일상을 개혁하기 위해서이고, 주중의 압박 속에서도 삶을 이어가는 것은 주말의 행동을 통해 내일을 기약할 수 있다는 희망 때문 아닌가.
촛불집회와 박사모집회를 저울에 재 보니 무게가 똑같더라는 식으로 호도하는 언론이 있다. 〈조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