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부끄럽고 싶지 않았다."
미국에서 고등학교 졸업식 파티는 학생들에게 최대의 축제다.
딸은 일본에서 태어났지만 외모 때문에 일본인으로 여겨지지 않았다.
패션과 마찬가지로 MBTI 류의 테스트도 한참 유행이 돌았다 사그라들곤 한다.
가슴이 미어진다.
"손흥민이 얼려버렸다"
반생태적, 비인도적, 비교육적인 축제이다
어쩌다 인권을 둘러싼 환경이 이렇게 나빠졌는가.
누가 더 실리를 얻었느냐보다 중요한 것
"왜 사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을 기다리지 않는 것은 그 질문이 합당하지 않아서가 아니다. 그 질문이 중요하지 않아서도 아니다. 단지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사색하고 있기엔 삶을 살아간다는 것이 결코 만만치 않은 과업이기 때문이다.
기적적으로 한 중견기업의 서류 합격 문자를 받은 뒤 나의 직장 생활은 시작되었다. 첫 출근을 하던 날엔 9시까지 출근이었음에도 새벽 6시부터 일어나 준비를 했고, 한 시간이나 일찍 회사 근처에 도착해 예전부터 하고 싶고, 부러웠던 '정장 입고 스타벅스 커피 한 손에 들고 출근하기'를 시도했다. 그런 나의 생각이 조금씩 무너지기 시작했던 건 4년 차에 접어들면서였던 것 같다.
탁 행정관을 비난하는 이들은 그가 과거 책에서 여성혐오 발언을 했고, 여성을 비하했으며, 여성을 성적으로 대상화했다 말한다. 그런데 일각에선 탁 행정관을 옹호하는 목소리도 조금씩 들린다. 탁 행정관의 과거 발언이 다소 문제가 될 소지가 없지 않지만 그게 행정관에서 경질할 만한 잘못은 아니라는 것이다. 이를 두고 소셜 미디어나 각종 게시판에서 불꽃 튀는 논쟁이 벌어지는 것을 종종 목격하는데, 그런 논쟁은 건설적인 논의로 이어지기 보단 상대방을 모욕 주고 비방하는 이전투구로 끝나는 것이 다반사이다. 이번 탁 행정관 이슈를 매개로 그간 한국 페미니즘 운동에 대한 일반인의 선입견, 불신, 오해 등이 한꺼번에 분출되면서 합리적인 공론의 장이 좀처럼 자리를 잡지 못하고 있다.
청년들은 사랑하는 가족과 시민들을 지키기 위해 기꺼이 젊음을 희생하며 국방의 의무에 응한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들이 군에서 배워 오는 것은 자긍심이 아니다. 인간 이하의 대우 속에 불합리에 굴종하고, 불의를 인내하는 일에 익숙해질 뿐이다. 군은 '애국'이란 명분으로 거대한 부조리를 재생산한다. 이렇듯 존엄성을 훼손당한 제대 군인들이 끊임없이 사회로 던져지는 현실에서 국방의 의무는 절대 신성할 수 없다. 싸워서 이길 수 있는 군대는 화려한 수사나 요란한 신무기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군인의 자긍심에서 비롯됨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국회는 기본적으로 국민의 대의기관이라는 점에서 대량의 문자로 표출된 민의를 통해 의원들의 의사표현이 제한되거나 특정행위를 강압받는 것이 반드시 나쁜 것이라 보기도 힘들다.
트럼프는 양립할 수 없는 종교들이 말하는 각자의 진실들을 하나로 화합시킬 수 있는 능력 한 가지를 우연히 가지고 있다. 그가 진실에 전혀 관심이 없다는 점이다. 트럼프는 모순에 개의치 않는다. 그에게 있어 팩트는 팩트가 아니다.
나는 태어나서 학교를 한 번도 다니지 않았다. 초등학교, 중학교, 그리고 고등학교까지. 남들이 걸어오지 않은 길을 걷는다는 사실은 종종 불안을 야기했다. 열일곱, 고등학교 1학년 나이가 될 무렵 이러한 불안은 감당할 수 없으리만치 극심해졌다. 앞으로 무엇을 공부해야 하지? 대학에 가야 하나? 아니, 그 전에 대학에 들어갈 수는 있으려나? 군대는 어떻게 하지? 학벌, 연줄 없이 한국 사회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까? 수많은 의문이 머릿속을 맴돌았지만 모두 공허한 메아리일 뿐이었다.
독일의 경제학자 빌헬름 뢰프케는 평생 화두 하나를 붙들고 살았다. 바로 "칸트 괴테 베토벤의 나라 독일이 어쩌다 미치광이 히틀러에게 몰표를 몰아주어 제2차 세계대전이라는 재앙을 인류에게 안겨주었는가?"였다. 의문은 곧 이런 재앙을 되풀이하지 않으려면 독일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라는 성찰로 이어졌다. 뢰프케가 도달한 결론은 한 사회가 건강하려면 사회적 계층질서 피라미드의 최상층에 소수의 '윤리적 귀족'이 존재해야 하며, 무지한 대중들로 인해 세상이 흔들리지 않으려면 진정한 성직자 혹은 지식인과 같은 엘리트가 자기 역할을 다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많이 본 장면 아닌가? 임진왜란, 병자호란, 청일전쟁, 태평양전쟁, 한국전쟁, 이 모든 전쟁에서 한국은 주체도 아닌 처지였지만, 수십만에서 수백만을 헤아리는 한국 민간인들이 목숨을 잃었고, 수많은 청년들이 징집되어 사망했다. 특히 지금은 주변 강대국 패권이 이동하는 시기이기 때문에 조선 인조 때의 병자호란과 조선 말 청일전쟁 시기와 너무나 유사하다. 지금 사드는 고도 미사일이나 수도권 방어에는 거의 무용지물이라는 사실이 너무 분명하게 드러났고, 미국의 오랜 국방전략의 산물도 아니며, 록히드 마틴이라는 일개 군산복합체의 로비로 배치하는 것이라는 지적도 있다. 한국인의 생명을 지켜주지도 못하는 미국의 전략에 왜 한국인들이 총알받이가 되어야 하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