급진적인 변화를 거부하는 쪽을 택했다.
두 사람의 관계를 서로 다르게 정의하고 있다
몇달 전까지만 해도 트럼프와 김정은이 경쟁적으로 핵 단추 발언을 쏟아냈다
결국 좌파는 승리 속에서 패배했다.
한 개인에게 희망을 거는 경향은 그 자체로 전체적인 상황의 광기를 보여준다. 페르디난트 폰 시라흐의 연극 대사를 보면서 '북한이 괌에 미사일을 발사한다면, 미국은 어떻게 대응해야 할 것인가?'와 같은 일련의 선택들을 상상해볼 수 있다. 우리가 항상 염두에 둬야 하는 것은 전체적인 상황에 내재한 광기다.
불행히도 좌파 자유주의의 공적 영역 또한 갈수록 트위터 문화의 규칙들에 지배되고 있다. 짧은 글, 톡 쏘는 대꾸, 냉소적이거나 화난 논평이 지배적일 뿐 다단계의 논지 전개는 설 자리가 없는 것이다. 글의 한 대목(한 문장 또는 문장의 일부)을 잘라내서는 그에 대응하는 식이다. 이런 트위터식 대응을 지탱하는 입장은 자기 정당성과 '정치적 올바름' 그리고 잔인한 냉소주의의 결합이라 할 수 있다. 무엇이든 문제적인 발언이 감지되는 순간 자동적으로 그에 대한 대꾸가 발사되는데, 그것은 대체로는 상식적 수준의 '정치적 올바름'에 입각한 대응이다.
늙은 공산주의자답게, 나는 이념적-정치적 기준에 따라 영화를 판단한다. 그래서 내가 최근 12개월 동안 봤던 영화 중 최고는 의심의 여지없이 우디 알로니의 'Junction 48'이었다. 이번 베를린 영화제에서 상을 받은 이 영화는 젊은 '이스라엘계 팔레스타인 인'들의 곤경을 다룬다. 이들은 일상적으로 두 전선에서 끊임없이 고투한다. 이스라엘 정부의 압제, 그리고 자신들의 지역 사회 내의 근본주의자들의 압력이다. 주연은 유명한 이스라엘계 팔레스타인 인 래퍼 타메르 나파르가 맡았다. 그는 자신의 음악을 통해 팔레스타인 가족들이 여성을 '명예 살인'하는 전통을 조롱한다.
자본주의 체제의 위기로 인해 심화된 경제 문제를 이슬람이라는 종교 문제로 교묘하게 포장한 사안을 종교 비판을 통해 해결 가능하다고 믿는다면 번지수를 잘못 잡은 것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샤를리 에브도 사건처럼 엄연히 프랑스에서 나고 자란 젊은이들이 연루된 일을 이슬람의 문제로 치환하는 것 자체가 비약이라고 하겠다. 이 말은 종교로서 이슬람을 무조건 용인해야한다는 뜻이 아니다. 이슬람 문제가 아닌 것을 이슬람 문제로 착각하게 만드는 그 이데올로기를 비판하는 것이 긴급한 사안이라는 말이다.
우파의 선동과 인종주의가 합쳐진 이슬람 공포증과 정당한 이슬람 비판을 분간하지 않으려는 좌파의 위선은 쿠아시 형제의 범죄를 무조건 인종차별과 계급갈등의 폭발로만 해석한다. 그러나 범행 직후 쿠아시 형제는 '알라는 위대하다!'고 외쳤지 '이슬람을 차별하지 말라!'거나 '우리에게 일자리를 달라!'고 외치지 않았다. 이슬람은 미개한 때문이 아니라 한때 너무 영광스러운 역사가 있었다는 것이 문제다. '옛날에 우리집 부자였어'라는 이들의 자원은 열등감이 아니라 턱없는 자긍심이다. 바보들만 이 역설을 모른다.
지제크는 이 책 서문에 "나는 철저한 무신론자"라고 밝혔다. 모두 알다시피, 무신론자가 곧 좌파는 아니지만, 급진 좌파의 '급진'을 뿌리까지(radical) 사유하게 되면, 거기에 가닿게 된다. 이런 사실이 샤를리 에브도 사건에 대해 말해 주는 진실은, 이택광처럼 어정쩡한 좌파와 달리 급진 좌파는 같은 사건을 계급갈등에 고착시키거나 제국주의로 환원시키지 않고, 더 멀리 나아간다는 것이다. '가짜 좌파/급진 좌파'가 이런 기준으로 나뉘는 것이라면, 이처럼 어리석은 사도(使徒)는 어느 방으로 모셔야 할까?
지제크는 테러를 당하기에 충분하지 않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장정일처럼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충분하지 않다고 말하는 것이다. 지금까지 지적한 오해의 문제가 명확하지 않은 번역 탓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문맥을 따져보면 충분히 의미를 유추할 수 있는 내용들마저도 이미 수립된 자신의 의견에 맞춰 임의로 갖다 붙인 것은 이해하기 어렵다. 논란이 되는 사안일수록 자신의 편견을 넘어 더 객관적이고 냉정한 시선을 유지하도록 노력하는 신중한 태도가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아닌가 한다.
"맥락을 고려하자는 사람들은 말한다. 샤를리 에브도를 공격한 형제들은 미국이 이라크에 주둔한 것이 너무 끔찍해서 놀랐다고 한다.(맞다. 하지만 그 형제들은 프랑스 풍자 잡지 대신 미군의 군사시설을 공격할 수 있었다. 왜 그렇게 하지 않았나?) 이슬람인은 사실상 서구에서 가장 착취당하고 대접받지 못한 소수라고 한다.(맞다. 그러나 아프리카계 흑인은 훨씬 더 심하다. 그러나 그들은 살인을 하거나 폭탄을 던지지 않는다.)" 방금 본 것처럼 지제크는 맥락을 고려하자는 사람들, 곧 쿠아시 형제에게 온정적인 좌파 지식인들에 대한 공박을 모두 괄호 처리했다. 괄호는 종종 '이런 것까지 가르쳐 줘야 해?'라는 가외의 메시지를 전달하려는 형식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