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많이 후회되고, 미안하다는 아버지.
"미래세대가 희망을 잃으면 공멸은 불가피하다”
올해 1학기에 원격수업을 받은 대학생들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유시민과의 공방을 모조리 정리해봤다.
동성혼의 법제화를 반대하셨다고 해도 그것은 차별입니다. 동성애를 좋아하지 않는다라는 개인적인 의견이였다고 하셔도 그것은 차별입니다. 나라를 나라답게, 든든한 대통령, 준비된 대통령이 우리의 슬로건입니다. 후보님의 나라에, 후보님께 든든함을 느낄 국민에, 그리고 후보님의 국정운영에 수많은 소수자들이 함께 있다는 점, 꼭 기억하시길 바라겠습니다. 부디, 이 선거가 나를 부정하고, 친구들을 부정하는 선거가 되지 않길 바랍니다.
가장 중요하고 어려운 과제로서 '교육 마피아'를 척결해야 한다. 이들은 교육부 고급관료만이 아니다. 비리사학의 '소유주'들 외에도 각종 위원회에서 교육부의 충실한 꼭두각시 노릇을 하거나 장차관 자리를 꿰차는 교수들을 포함하며, 교육부 출신으로 교수, 총장, 이사(장)으로 변신하는 이들도 잊어서는 안 된다. 이들의 실상은 아직 대중에게 충분히 폭로되지 않았다. 총장 외의 주요 비리 관련 교수가 다 구속된 이화여대의 경우, 지원한 정부 재정지원사업이 모두 선정된 일은 '비선실세'와 더불어 교육부의 조직적 공모자(들)이 있어 가능했을 것이지만 아직 진상은 숨어 있다.
우리나라 사립대학 등록금은 미국에 이어 세계 두 번째로 높다. 2014년도 학부 등록금을 비교해보면 미국 21,189달러, 우리나라 8,554달러, 호주 8,322달러, 일본 8,263달러로 우리나라 국민소득 대비 사립대학 등록금이 아주 높음을 알 수 있다. 우리나라 석사 학생 등록금은 1만 2천 달러를 넘어서서 호주와 일본의 두 배 수준을 넘는다. 학부 학생 100명 감소는 85만 달러의 수입 감소를 의미하는 상황에서, 학생이 줄 경우 이를 대체할 만한 소득원이 별로 없는 대학으로서는 학생 수 감축은 곧바로 대학의 재정위기로 직결되기 때문에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학부정원을 지키려고 애를 쓸 수밖에 없다.
근대 대학의 창시자인 훔볼트는 대학이란 "미래의 유토피아를 선취하는 곳"이라고 했지만, 이 땅의 대학이 보여주는 것은 끔찍한 디스토피아의 모습이다. 대학은 이 사회에서 가장 악랄한 노동착취 기구가 되었다. 시간강사는 교수의 10분의 1에 불과한 연봉을 받고 교육하고 있으며, 조교는 최저시급에도 못 미치는 돈을 받고 행정업무에 내몰리고 있다. 대학만큼 임금착취가 자심한 곳은 어디에도 없다.
당장 내년부터 강행하겠다는 '시간강사법'은 시행을 위한 구체적 준비도 되어 있지 않을 뿐 아니라 현실에도 맞지 않아, 이 법이 시간강사들에게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개설 강의의 숫자를 줄이고 몇명에게 강의를 몰아주게 되니 오히려 시간강사들의 처지는 더 종속적이 될 것이라는 우려가 크다. 그나마 대학과 1년 단위로 계약하게 될 일부 강사들의 경우에도 최저임금을 충족시킬 수 있을지조차 의문이라고 하니, 교수니 인문학 연구자니 그런 대접 다 필요없고 노동자로서 정당한 대우를 하라는 요구가 더 적실하게 된 형편이다.
기본적으로 고등학교의 직업계열교육과 전문대학 개혁에 방점을 찍어야 한다. 이건 명확한 것 같다. 전문대학은 고용기금을 가지고 운영되는 폴리텍 모형이 있으니 잘 들여다보고, 제조업 위주로만 협소하게 구성된 부분은 보완해야 한다. 두 번째는 국공립대학의 등록금을 실질적으로 현격하게 낮추고, 미국의 어퍼머티브 액션(affirmative action: 소수 계층 우대 정책) 제도를 도입하는 것이다. 저소득층 자녀일지라도 학업의지와 능력이 있다면 좋은 지방대학에서 공부할 수 있도록 기회를 제공하자. 지방대학도 살리고 교육 불평등도 해소할 수 있다.
많은 이들이, 특히 진보 인사들이 더 이상 '개천에서 용이 나지 않는 세상'을 개탄한다. 그러면서 개천에서 용이 날 수 있게끔 세상을 바꿔야 한다고 말하는데, 그게 과연 올바른 해법인지는 의문이다. 우리는 개천에서 난 용을 보면서 꿈과 희망을 품곤 하지만, 모두가 다 용이 될 수는 없으며, 용이 되기 위해 얼마나 많은 사람이 고통과 희생을 감내해야 하며, 용이 되지 못한 실패로 인해 얼마나 많은 사람이 좌절과 패배감을 맛봐야 하는지에 대해선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는 그저 개천에서 난 용을 향해 박수를 치고 환호하면서 우리가 사는 세상이 살 만하다고 자위하는 동시에 '희망 고문'을 사회적 차원의 정책으로까지 끌어올리는 일을 계속해오지 않았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