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은 자위함기를 욱일기의 일종으로 소개하고 있다.
광복 74주년 경축사
아베는 국제 여론전에서 이미 패배한 상태다
닌텐도의 자회사이자 ‘포켓몬스터’ 1세대부터 개발에 참여한 개발사 '크리처스'.
제가 〈제국의 위안부〉를 통해 시도한 일은 오로지 자신의 체험을 드러내놓고 말하지 못하고, 말했으나 잊혔던 목소리를 그저 복원하고, 세상사람들이 들을 수 있는 공간으로 내보내는 일이었습니다. 물론 그런 목소리만이 진짜 진실이라고 말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위안부할머니들을 둘러싼 일임에도 위안부문제가 당사자의 일부를 점점 제쳐놓고 진행되는 것을 보면서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침묵하게 된 분들의 목소리도 일단 들어야 한다는 것이 저의 생각이었습니다. 그리고 당사자들 간의 생각이 다르다면, 주변 사람들도 함께 다시 생각해 보자, 오로지 그것뿐이었습니다.
망인이 친일행위를 거부하였을 경우 정상적 기업 활동이 불가능하였다면, 그의 친일행위를 자발적 친일행위로 간주할 수 있겠습니까. 기업가인 망인으로서는 국가도 유지하지 못하는 관념의 공동체를 위해 자신의 사업을 반드시 그만두어야 할 이유가 전혀 없었다고 생각합니다. 망인이 자신의 직업인 기업 활동을 계속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비유컨대 일제에 곡식을 공출 당하는 것이 친일행위에 해당하기 때문에 농업을 그만둔 농민이 있었다면, 그는 대한민국정부로부터 훈장을 받아 마땅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바로 그 농부가 계속 농업에 종사했다고 하여서 그를 친일반민족행위자로 규정할 수는 없습니다. 그 점은 종사하는 직업이 공업이든 상업 또는 교육이나 기업 활동이라 해서 달라질 이유가 없다고 믿습니다.
"먹을 것은 직접 농사짓고 난방도 로켓스토브 같은 적정기술을 활용해 해결해요. 통신비나 차량 유지비도 최소한으로만 써요. 생활하기 위해 많이 일하지 않아도 되니 스스로 돌보거나 사랑하는 사람들을 만나 많은 시간을 행복하게 보내요." 지금처럼 풍요롭게 살게 된 것이 스스로 놀라워 그는 청년들에게 당장 일을 그만두고 시골에 가라고 말해 주곤 한다. 상상력을 발휘해 다른 삶을 살 수도 있기 때문이다.
중국은 박근혜 대통령의 그간의 노오오오력에도 불구하고, 초기에는 북한의 도발을 비난하는 듯하였으나 오히려 도발을 일으킨 북한뿐만 아니라 그러한 북한의 도발에 대응하는 미국이나 우리나라 등 주변국들도 함께 싸잡아 비난하는 듯한 태도를 보이고 있다. 심지어 우리 외교장관은 중국 외교부장과의 전화통화조차도 (다른 한반도 주변국들 외무장관과는 달리) 상당히 늦게 하였으며, 한-중 국방장관 간의 핫라인도 불통인가 하면, 박근혜 대통령은 아직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과 전화통화조차 못하고 있다. 필자는 네 가지 이유로 중국이 북한을 절대로 버릴 수 없기 때문에 남북한 간의 갈등 상황에서 중국이 남한 편에 서는 일은 (우리의 희망과는 달리) 있기 어렵다고 생각한다.
아베담화에도 식민지배와 위안부 등에 대한 언급이 나오지만 '일제'라는 가해주체가 명확하게 등장하지 않는다. 한 마디로 '주어'가 없다. 만주사변의 배경으로 세계공황을 든 것, 전후 세대에게 책임을 묻지 말라는 으름장(?)에 이르면 말문이 막힌다. 요컨대 아베담화는 반성의 내용과 형식 모두 낙제점이다.
박수는 치겠다마는 좀 이상하지 않은가? 남부연합기라면 150년 전인 1865년에 끝난 남북전쟁에서 북부 즉 지금의 미국 연방정부에게 패해서 망했었던 남부연합의 상징인데 도대체 그런 폭망한 정치세력의 깃발이 왜 때문에 오늘날까지 미국에서 휘날릴 수 있었던 것일까? 어처구니 없는 노예제도를 유지하던 남부는 다 망한 것 아니었나? 이에 대한 답을 얻기 위해서는 남북전쟁의 발발에서 종식 그리고 그 전후처리 과정을 살펴 보아야 한다.
형의 행방을 찾았던 "동생"이 그의 마지막 모습을 자세히 알게 된 것은 광복부터 무려 40년이 지난 1985년. 그러나 "동생"이 마주한 것은 더욱 어려운 현실이었다. 물론, 그 중 하나는 제2차대전 이전 한반도 "청구권"에 관한 모든 문제는 1965년에 체결된 한일조약으로 모두 해결됐다는, 일본 정부의 완고한 자세였다. 그러나 냉담한 태도를 보인 것은 일본 정부만이 아니었다. 70년에 걸쳐 형의 명예회복과 보상을 요구하며 활동해온 "동생"이 유일하게 얻을 수 있었던 것은 한국 정부의 "공식적인 친일파 인정"일 뿐이었다. "동생"은 말한다. "적어도 특공 전사라는 인정을 일본 정부가 취소했으면 좋겠다". 그렇게 하면 조금이나마 형의 부담이 가벼워진다고 한다.
김정은이 왜 러시아 방문을 하지 않기로 했는지에 대해서는 현재로서는 추측만 난무한 것 같은데, 엉뚱하게도 내 관심을 끈 것은 바로 그 '북한 내부 사정'이라는 말이었다. 김정은의 할아비인 독재자 김일성 시절에 일어났던 어떤 사건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내게 떠오른 김정은의 할아비 독재자 김일성 시절에 일어났던 어떤 사건이란 바로 1956년 8월에 있었던 8월 종파(宗派) 사건이다. 당시 김일성은 소련과 동구권을 그 해 6월부터 7월 경까지 방문하고 있었는데, 북한의 독재자가 이렇게 평양을 비운 사이에 북한에서는 거의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김일성을 몰아 내려는 반역 모의가 진행되었던 것이다! 어쩌면 북한이 오늘날과 같은 3대 세습 독재 국가로 굴러 떨어지지 않을 마지막 기회였을 이 사건의 경과를 한 번 살펴 보기로 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