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엄사 문제를 언급한 김영옥.
왜 우리는 그냥 있음으로 가치를 인정받지 못하는가.
기독교계와 의료계의 의견이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다.
어쩌다 인권을 둘러싼 환경이 이렇게 나빠졌는가.
연명의료란 치료 효과 없이 환자의 생명만을 연장하기 위해 시도하는 의료행위를 말한다.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기계 안에 들어간 사람은 1분 내에 의식을 잃고 사망한다.
‘안락사‘(安樂死)와는 다른 개념이다.
영화를 보면서 "왜 저 남자는 처음 만난 여자에게 반말을 하며 으스대지? 왜 저 여자는 별로 나이가 많지도 않은 저 남자를 아저씨라고 부르지?"라는 질문이 먼저 떠오르는 건 심각한 문제다. 어떻게 되었는지 알 것 같다. 이 영화를 기획하고 제작하고 각본을 쓰고 감독한 사람들 중 그 어느 누구도 이게 문제가 된다는 걸 몰랐을 것이다. 텔레비전만 틀어도 툭하면 처음 보는 여자들에게 반말을 해대는 무례한 남자들과 그들을 아저씨라고 부르는 맥 빠진 여자들이 부글거리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게 정상이 되는 건 아니다. 비정상인 언어가 많을 뿐이다.
[찬성] 고통을 실제로 겪는 환자에게는 매일매일이 고통스러운 나날이다. 회생할 수 없는 환자에게 이루어지는 연명치료는 생존 기간을 늘리는 것이 아니라 고통스럽게 죽음을 연기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극심한 고통 때문에 죽을 권리는 유일한 희망일 수 있다. [반대] 죽을 권리를 허용하면 자발적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강요된 죽음이 될 가능성이 있다. 사회적, 경제적 약자들은 죽을 권리가 '죽음을 선택할 권리'가 아니라, '죽어야만 하는 의무'가 될 수 있다. 회복 불가능한 환자의 고통을 덜어주는 게 아니라 '귀찮고 쓸모없는 인간'을 제거하는 수단으로 전락할 수 있다.
소셜미디어 환경에서 유명인의 프라이버시는 더더욱 불가능해 보인다. 하지만 프라이버시는 존엄한 삶과 죽음을 위한 필수조건이다. 보위의 이별 방식은 프라이버시 소멸 시대에 어떻게 존엄함을 지킬 수 있는가를 알려준다. 가족과 친지, 의료진은 물론이고 마지막 활동 과정에서 만난 음반제작자, 영화인, 사업가 등 숱한 사람들 중 누구도 보위의 건강 상태를 누설하지 않은 덕분이다. 프라이버시 소멸 시대의 '기적'이라는 평가가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