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의 야망과 분투, 사랑과 갈등, 연대를 담은 내용이다.
누군가를 배제하지 않고도 따뜻한 한끼 식사를 함께 할 수 있을지 고민이 필요하다.
우리나라 교육 현실의 장르는 스릴러다.
우리 모두 업데이트를 하자.
무엇이 나은지는 우리 모두 알고 있다
폭력으로 점철된 배움이라면 감내할 필요가 없다
A는 인생에서 거쳐온 고비라곤 수능밖에 없는 지루한 서사의 인간이었다. 세상에 대해 평론하고 싶은 것이라곤 맛집밖에 없는 인간이었다. '이 가게 점원 태도가 어쩌네 저쩌네' 하며 아르바이트생의 인성을 운운하는 A를 볼 때면 나는 그를 멸시했다. 사랑이 도취나 찬양이 아닐 수 있고, 어떤 욕구의 교환일 수 있다는 걸 A는 내게 가르쳐줬다. 내가 그를 멸시했던 것은 그를 잘 이해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사랑할 수 있었던 이유는 그가 나를 잘 알기 때문이었다.
나는 누군가 나를 사랑하고, 내 몸을 원한다는 것에 금세 도취되었다. 그 애는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고, 누군가를 자신이 통제할 수 있다는 것에 도취해 있었다. "오늘은 싫어"라고 말하면 그 애는 "너무나 너를 원한다"고 말하는 떼쟁이가 되었다. 선망의 대상이 되는 기쁨. 누군가를 '사랑'하는 게 아니라 '소유'하려 들기 시작하면 이런 기쁨을 갈망하게 된다.
우리는 바비인형의 옷을 벗기며 노는 유아기를 거쳐, 마침내 섹스라는 단어라곤 없는 것 같은 우중충한 사춘기에 도달한다. 섹스라는 단어를 말하면 불에 데기라도 하는 양, '그것', '그 짓', 나아가면 '야한 짓' 정도로 쉬쉬하며 마음속에 각기 다른 환상을 품는 시기가 있었다. 내게 섹스에 대해 처음으로 힌트를 준 사람은 초등학교 2학년 때 가장 친했던 친구. 친구는 한 손으로 엄지와 검지를 모아 동그란 원을 만들고 다른 손으로 그 허공의 원을 쿡쿡 찔러대 관통하는 시늉을 했다. "우리 엄마가 아가는 이렇게 생긴대." 그 허공에서의 손짓이 첫 힌트였다.
내 한 표는 테마파크와 운동장이 필요한 '정착민'을 위해 쓰인다. 나의 억울함은 여기에 있다. 정착민이 못 된 것은 나의 의지가 아니다. 계약이 끝나서다. 전월세로 살면서 이 집 저 집 떠돌아야 하는 부평초 신세엔 테마파크는 남 일이다. 이렇게 버린 표가 모여 열 표가 되고 백 표가 된다. 남의 동네 건물 세워주는 투표 봉사를 나 말고 또 몇 사람이나 함께 하고 있을까. 동네에 자본 없는 사람이 생각하는 지역구 투표라는 게 이렇다. 허무한 마음으로 비례대표 공보물을 뒤적이다가 문득 그런 생각이 든다. 선거가 민주주의의 꽃이 맞나. 꽃도 뿌리 내릴 곳이 있어야 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