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일생과 마찬가지로 한 국가의 지나간 운명은 되 돌이킬 수 없다. 자력근대화를 할 수 있었으나 일제가 불공정한 방법으로 기회를 빼앗은 것이라는 가설은 '만약'이라는 상상으로만 가능하다. '긍정적 역사창출'이라는 명분으로 자의적 해석된 민족적 자아도취만으로 암울한 국제정세를 헤쳐 나갈 수 있을지 의문이다.
마키아벨리는 공화국의 존립을 위협하는 것은 공화주의 정신을 부패하게 만드는 '불평등'과 '부자유'라고 보았다. 중산층과 중도층이 강고하지 못하면, 권력과 재산을 많이 가진 계층은 법과 제도를 지키지 않게 되고, 경제적으로 빈곤한 계층은 신분·지위·재산 같은 조건에 의해 타인에 예속되어 노예와 같은 '부자유'상태에 빠지게 된다.
서너 달 전까지 집권 여당에서 온갖 '올바르지 못한' 짓거리를 벌이던 사람들이 일부 몰려나와 갑자기 '바른' 정당을 만들었단다. 물론 그들만의 이야기다. 집권당으로 있을 때 저질렀던 짓거리에 대해 깊은 반성이 있는 것으로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생각해 보시라. 이들이 노동자와 농민, 비정규직, 청년실업자의 고통스러운 삶에 대해, 평화통일에 대해, 세월호 유가족의 눈물을 닦아주고 진실을 찾는 일에 대해 어떻게 행동했던가를.
박근혜 정부는 과거 색깔론의 시각적 영역을 넓히는 성과를 이뤄냈다. 그동안 새누리당의 상징 색에 익숙한 나머지, 빨간색이 진부하게 여겨진 탓이었을까? 박근혜 정부는 색깔론에 검정색을 입혔다. 예술작품으로 치자면 형식적 변화를 꾀한 셈이다. 그뿐인가? 최근 교육계에는 '블루리스트'까지 등장하고 있다고 하니, 빨간색과 검정색에 이어 파랑색에까지 이른 셈이다. 어쨌든 박근혜 정부는 색깔론의 시각적 다양성을 일궈냈다. 그러나 창조경제의 긍지로 뭉친 이들의 창의성이 이 정도에서 멈출 리 없다. 형식의 다양성뿐만 아니라 내용의 확장성을 통해 '신종 색깔론'을 완성시켰다.
평생 꽃길만 걸어 온 반 전 총장은 또다시 꽃가마를 타고 꽃길을 걸을 기대에 부풀어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는 나이 못지않게 사고도 구시대적이다. "대한민국 발전에 도움이 된다면 내 한 몸 불사르겠다"는 출사표는 살신성인(殺身成仁)과 멸사봉공(滅私奉公)을 외치던 1970년대를 연상시킨다. 새마을운동을 칭송하고, 일본과의 위안부 합의를 높이 평가하는 데서는 기회주의의 구린내가 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