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지야, 먼지야. 진찰대에 누워 눈을 껌벅이는 고양이의 이름을 불렀다. 오른쪽 송곳니를 제거한 먼지는 가까스로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보았다. 앙다문 입 사이로 핑크빛 혀가 비죽이 튀어나와 있었다. 수의사는 마취가 덜 풀렸다며 나를 안심시켰지만, 가끔은 혀를 내민 채 돌아다니는 먼지의 모습을 볼 수 있을 것이라 했다. 고양이의 송곳니는 사냥만을 위한 무기가 아니며, 혀가 제 몸을 뉘는 휴식처이기도 하다고 덧붙였다. "그래서 수의사들은 송곳니를 혀의 요람이라고도 불러요."
아이의 행동이 도를 지나친 것처럼 보던 것은, 자학과 겸손을 혼동하는 나의 문제다. 나는 남이 한 칭찬을 순순히 받아들이거나 스스로를 칭찬해서는 안 된다고(비뚤어지고 거대한 자의식을 남몰래 사랑하면서) 믿고 있었다. 나에 대한 타인들의 기대를 낮추고 응석을 부리려고 꾀를 쓴 것일지도 모른다. 내가 못났다고 떠들고 다니면 꼭 누군가는 지치지 않는 위로를 건네곤 했다. 소화할 수 있는 형태로 가공한 칭찬과 응원의 맛은 달콤했다. 겸손의 탈의 쓴 비겁함은 딸의 잘난 척보다 유아적이었다.
상대를 알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교만함이나 권력, 무지함 자체가 악의인지도 모른다. 이해하고자 하는 마음이 선행되지 않는 호의는 '베푸는 자'의 자위일 뿐이다. "어째서 고마워하지 않아? 내가 얼마나 잘해줬는데." 배은망덕이란 사자성어를 입에 담기 전에 과거의 친절을 되짚어 봐야 하는지도 모른다. 독심술이 없는 이상 사람들이 원하는 것을 정확히 알아차리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지만, 신중해질 순 있다. 상대의 시각으로 문제의 깊이를 재고 고민하며 나의 시간을 나누는 것. 그게 호의의 시작 아닐까.
문화적 고립이 두려울 뿐 신체가 늙는 것은 아무렇지 않다며 폼 잡던 인간이여, 영원히 굿바이. 나는 몸이 늙는 것도 견딜 수 없다. 럭키 서른 세븐이라 부르며 내 나이를 축복하던 여유는 순식간에 사라졌다. '타고난 노안은 세월이 흐르면 동안이 됩니다.' 평생 늙어 보였던 내게 꿈과 희망을 안겨줬던 전설은, 완전 거짓말이었다. 이목구비까지 없앨 작정을 한 셀카 애플리케이션으로 사진을 찍었음에도 나의 노화는 감출 수 없었다. '느껴져. 지금도 늙고 있어. 무덤으로 5센티 전진했어.' 비탄에 빠진 나는 젊음을 위해 갖은 노력을 기울였다.
전 당신이 촌스럽다고 떠들고 다녔어요. 제게 아이가 생겨도 절대 당신을 가까이하지 않을 거라 결심했죠. 누구나 젊은 시절에는 세련된 것을 추구하니까요. 안타깝게도 그런 결심은 아이가 두 살이 되자 무너지고 말았어요. 죽은 생선 같은 눈빛으로 징징대는 아이를 달래던 날, 전 당신에게 항복했어요. 당신은 '밤바라 밤바라 바라바라밤' 경쾌한 노래를 부르며 나타나 나를 정복했죠. '너는 우리를 필요로 한다.' 당신은 안경 너머의 까만 눈알을 번득이며 내게 굴욕감과 휴식을 안겨줬어요.
"이기적이라고 매도해도 좋아. 어쩌면 딸보다 내 삶을 더 중요하게 생각해서 이혼했는지도 몰라. 후회는 안 해. 이혼 안 했으면 매일 싸우는 부모, 미쳐가는 엄마 모습이나 보여줬을 테니까. 명랑한 내 딸이 나중에 아빠 없는 슬픔을 느끼게 된다면, 그건 언니 같은 사람들 때문일 거야. 너 슬프지? 슬프지 않니? 분명히 슬플 거야, 그렇게 강요하고 있잖아. 무엇이 결핍되었나 구경하고 싶어 하잖아. 내 딸이 전남편과 맺는 관계가 어떨지 나도 몰라. 그저 둘만의 답을 찾길 바랄 뿐이고 그건 이혼하지 않았어도 마찬가지였을 거야. 그러니 제발, 이혼이 세계의 종말이라도 되는 듯이 말하지 마. 누군가에겐 새로운 세계의 시작이거든."
"울지 말고 천천히 말해 봐, 왜 속상한지, 원하는 게 뭔지 말로 해 봐." 딸의 좌절된 욕망과 감정을 파악하기 위해 질문할 때면, 나는 미제 사건이 될 수사 파일을 손에 쥐고 있는 형사 같다. 감정의 폭발을 일으킨 원인을 찾기 위해 아이를 취조하며 나쁜 경찰, 좋은 경찰 역할을 번갈아 연기한다. 진실에 접근하기 위해 가설도 세운다. '핫도그 폭발: 설탕 과다 복용으로 인한 충동적 떼쓰기인가? 억지로 운동화를 신긴 것에 앙심을 품고 교묘히 계획한 보복인가?' 딸이 묘사하는 범인(당신의 분노는 어떻게 생겼습니까?)의 몽타주는 추상화에 가까워 수사에 도움이 되는 법이 없다
별로 유해할 것 없는 만화라는 것이 나의 결론인데 어째 딸과 함께 볼 때마다 고군분투하는 소피아가 마냥 안쓰럽다. 진정한 공주가 되기 위한 조건이 까다롭기 그지없기 때문이다. 소위 지덕체의 조화, 내면과 외면이 아름다워야 하는 것은 물론이고 늘 타인의 마음을 배려하며 자신의 욕망을 조율해야 한다. 남의 죄는 기꺼이 뒤집어쓰되 자신의 성취에 대해 절대 잘난 척해서는 안 된다. 전력을 다해 삐딱한 내가 보기에 〈리틀 프린세스 소피아〉에 나온 현대판 공주의 미덕이란 여성을 향해 예쁘게 설치된 덫에 가깝다. 교묘히 업그레이드 된 억압이랄까.
고양이와 사랑에 빠지면 고양이를 모르던 이전의 세계로 다시 돌아갈 수 없다. 처음으로 동네 길고양이들에게 멸치를 먹였던 날, 나는 인터넷 쇼핑몰에서 대형 고양이 사료를 주문했다. 그리고 그 뒤로 3년간 계속 캣맘으로 살았다. 이십대 후반, 분명 연애도 하고 그림도 그렸으며 음악을 시작해보겠다고 아등바등했는데도 그 시절을 압축해서 한 단어로 설명하라고 하면 나는 '캣맘'밖에 떠오르지 않는다. 길고양이들에 대한 추억이 연애의 흔적보다 강렬하다.
고개를 젖히며 상쾌히 웃는 딸. 아이의 웃음을 신호로 움직이는 '우울하면 반칙 기동대'가 잽싸게 다리미를 들고 내 마음에 뛰어든다. 자글자글한 기분의 주름을 완벽하게 다려준다. 막가파 유아 역할을 접어두고 '모든 것이 멋져' 모드로 전환한 딸의 웃음을 듣고 있자면, 흐린 날의 기억들이 전부 왜곡된 것이 아니었나 착각이 든다. 딸의 머리카락에 붙은 밥풀을 뗀 것 외에 아무런 성취 없이 지나간 하루도 용서할 만한 것이 된다. 맑고 밝게 퍼지는 웃음소리에 담긴 강력한 확신 덕이다. '엄마, 나는 앞으로도 계속 세상을 이렇게 느낄 거야.' 근거 없는 낙관을 걸쳐도 어색할 것이 없는 나이. 딸의 웃음은 힘이 세다.
부정적인 인식을 느낄 때마다 나는 운명론자가 아닌 낭만주의자라고 둘러댔다. 각자가 가진 사주팔자, 원국이 보여주는 풍경과 조후가 신기하고 아름답기 때문에 공부하는 것이라 변명했다. 가까스로 찾아낸 납득 가능한 이유였지만 아주 지어낸 말은 아니었다. 자신을 나타내는 글자 본원과 그 주변 오행들이 풀어내는 인간의 서사. 부대끼고 순환하는 이야기를 읽어내려가는 일이 정말 즐거웠다. 맞냐, 틀리냐를 떠나 그저 한 사람의 인생 골격을 보고 상상하는 기쁨만으로도 충분히 공부할 가치가 있는 것이었다. 처음부터 '나쁜 사주는 없다'는 〈명리〉의 문장을 마음에 품고 시작했기 때문이다.
아빠와는 늘 사이가 좋았어요. 비슷한 성향인 데다 제가 뭘 하던 개입하지 않고 가만히 지켜보는 편이었거든요. 엄마는 저와 아빠의 관계를 두고 '덜 사랑하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그렇게 말했어요. 그래서 저는 생각했죠. '그렇다면 엄마가 제발 나를 덜 사랑해줬으면 좋겠다. 엄마가 나를 덜 사랑한다면 나는 엄마를 더 사랑할 수 있겠구나. 적절한 거리를 유지하며 서로의 존재만으로도 위안을 받을 수 있는 사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다 읽고 방치한 책들은 꽉 찬 책장에 자리 잡지 못하고 바닥과 책상, 침대에 켜켜이 쌓여 사나운 기둥이 된다. 그래도 나는 책을 계속 사들이고 있다. 흥미로운 책이 출간되었다는 소식을 들으면 괴로워서 뒹굴거리다 유혹에 항복한다. 고뇌와 지름의 과정을 관찰하여 결론 내건대, 나는 독서가가 아닌 귀 얇은 소비자에 가깝다. 책들과 통장을 학대하고 있다. 죄책감으로 심란한 마음을 달랜답시고 정리정돈 기술에 관한 책을 사서 책 기둥의 키만 키우는 어리석음이라니.
딸의 세계는 나의 것보다 훨씬 근사하다. 영어도 한글도 숫자도 모르는 아이는 내가 영영 돌아갈 수 없는 곳에 살고 있다. 그곳의 풍토와 거주민의 모습은 딸의 상상에 따라 변한다. 솜사탕 만드는 언니가 사는 달콤한 자매의 집, 팬케이크만 훔치는 괴물이 숨어 있는 아침밥 도둑의 산, 나쁜 곰이 통치하는 버려진 장난감의 숲. 만화와 동화, 딸에게 흘러들어온 이야기들은 콜라주가 된다. 현실과 상상이 뒤섞여 예쁜 소용돌이를 만든다. 나는 잠든 동심을 깨워 딸의 문장을 이해하려 하지만 자꾸 길을 잃는다.
운동회 편 가르듯 내향적, 외향적 두 가지로 구분하면 편하겠지만 인간은 원래 복잡하다. 소심한 성격도, 그것을 고치려던 투지도, 또 어중간한 자리에 주저앉아 '어쩌다 보니 이렇게 되었소' 중얼거리는 것도 나다. 더는 과도한 노력을 하고 싶지 않다는 게으름까지 합세하여 알 것 같은데 모르겠는 사람이 되어버렸다.
너도 프리랜서 나도 프리랜서, 둘 다 집에 있으면 같이 육아를 해야지 왜 나만 노동량이 많은 거야? 공동육아가 꿈이었던 여자는 소리를 질렀다. 아이를 낳자 꿈은 그냥 꿈일 뿐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일단 '아이를 본다'는 개념이 서로 달랐다. 그는 자신의 아내가 관습적인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길 바랐고 가끔 '가부장적이지 않은 자신'을 칭찬해주기 바랐다. 육아를 돕는 나, 집안일을 돕는 나, 여러모로 아내를 '돕는' 자신이 대단하게 느껴져서 대놓고 조력자로 머물기로 했다. 조력자가 아닌 동료를 원했던 여자는 화가 났고 매일 싸우던 부부는 결국 이혼하게 되었다.
"할아버지는 오래 살아서 눈이 나빠졌어." 네 살 된 손녀를 안고 흐흐 웃는 아빠를 보면서도 나는 같은 생각을 한다. 올해 환갑이 된 엄마의 목소리는 여전히 미성인 반면 (미스터리 아닌가) 아빠의 목소리는, 미안하지만, 확실히 늙었다. 그러나 '잊히리라' 작정한 노가수 정태춘, 내가 제일 잘 아는 노인의 가창은 지금 가장 훌륭하다. 초기작들의 서정을 극대화하는 거친 음색을 듣다 보면, 마치 노래들이 '자네가 늙기를 기다렸네.' 미소 짓는 듯하다. 나는 내 취향을 근거로 새로운 앨범을 내야 한다고 아빠를 설득하는 중이다.
"예술 창조에 관한 두려움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하나는 자신에 대한 두려움이며, 다른 하나는 타인들이 자신을 어떻게 평가할까에 대한 두려움이다. 일반적으로 자신에 대한 두려움은 최상의 상태에서 작업하는 것을 막고, 타인의 평가에 대한 두려움은 자기만의 방식으로 작업을 하지 못하도록 한다." 내가 나를 드러내는 순간, 작품의 미흡함만을 지적당할 것이라는 이 두려움은 언제 끝날까? 난 아직 부족하고 아직은 때가 아니라는 변명은 언제까지 유효할까? 확신하건대 두려움은 절대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방법은 한 가지밖에 없다.
"날 위해 하얀 여자가 되어줄 수 없어?" 내게 황당한 부탁을 했던 남자가 있었다. 가무잡잡 태닝 한 피부에 밝게 염색한 머리, 짙고 얼룩진 눈 화장을 한 내게 하얀 여자가 되어달라니 순간 엄청난 저항감이 느껴졌다. 그가 말하는 '하얀'이란 태닝하지 않은 피부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었다. 하얗고 투명하게 변하길 바랐던 것은 내 성향 그 자체였다. 나의 타투, 화장, 옷차림에서 드러나는 '기 센 여자'의 기호들이 몹시 불편했던 것이다. 교정한다면 사랑할 수 있을 것 같은 여자에게 보내는 마지막 호소였달까.
묘 선생님이 그렇게 각별한 존재이다 보니 나는 새해가 다가올 때마다 괜한 슬픔에 휩싸인다. "내 나이보다 네 나이가 안 믿겨. 나는 인중이 길어 장수할 것 같은데 너는 어때?" 알 수 없는 묘상을 살피며 돌아오지 않는 대답을 기다린다. 고양이에게 주어진 시간은 인간보다 짧다는 것 깨달을 때마다 가슴이 조여온다. 세계 최장수 고양이를 검색하며 비결이 뭔가 고민한다. 그러다 가만히 내 고양이에게 말한다. "네가 나를 떠나면 나는 예전 같지 않을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