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헌법적이고 불법적인 국정농단"
정치적 반동은 '좋았던 시절'에 대한 향수를 불러일으킵니다. 국정교과서라는 시대착오적 시도로 인해 김대중-노무현 정부로 돌아가는 게 진보라는 착시현상이 일어납니다. 정치 의제에서는 김대중-노무현 정부 시절로 돌아가는 게 맞을 수도 있습니다. 일시적으로 민주/반민주 대립 구도가 재연되고 있으니까요. 그러나 경제나 사회 의제에서 현상유지나 복고는 곧 퇴보입니다. 결국 국정교과서 논란은 새삼 범진보세력 전체의 위기를 우회적으로 드러냅니다. 지향과 비전을 제시하지 못하고 '기존 것을 지키자' 내지 '과거로 돌아가자'고 하는 진보는 더 이상 진보가 아닙니다.
교과서 발행제도는 민주주의 발전사의 나이테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을 거꾸로 돌리려는 작업에 전국의 대학 선생, 지식인들이 좌와 우,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들불처럼 저항의 목소리를 내고 있는 것은 국정화 작업이 그들이 생명줄로 삼고 있는 학문·사상의 자유를 억압·위협할 수 있다는 위기의식 때문이리라. 이런 맥락도 모르고 국정화 작업이 아버지가 통치했던 유신시대처럼 대통령의 눈짓 하나에 일사천리로 진행될 것이라고 생각했다면, 그야말로 박근혜 대통령의 커다란 착각이자 몽상이다.
"내용은 둘째 치고라도 처리 방식에 반감이 들 수밖에 없다. 말은 공청회라지만 평일 2시에 어느 교사가 수업도 안 하고 갈 수 있나. 조퇴라도 하고 가서 말하면, 의견을 반영은 해주나? 제일 나쁜 사람이 어떤 사람이냐면, 마음껏 말해보라고 해놓고선 결국 자기 마음대로 하는 사람이다. 그럼 뭐 하러 입 아프게 얘기하라고 하나. 지금 정부가 딱 그렇다. 일반 기업도 대표가 회사를 그런 식으로 운영하면 직원들 반감이 있게 마련인데, 하물며 정부는 말해 무엇 하겠나."
정부가 역사교과서를 다시 국정화할지도 모른다는 이야기는 2013년 이른바 '교학사 교과서 파동' 때부터 있었다. 이때만 해도 '설마 거기까지야'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정부가 마침내 단일한 국정교과서를 만들어 2017년부터 사용하겠다고 공식 선언했다. "올바른 교과서"란다. 박근혜정부 들어 "이렇게까지 하느냐?"는 탄식을 자주 듣는다. 민주적인 사회에는 암묵적으로 형성되는 어떤 합리적인, 예측 가능한 범위와 한계가 존재하는데, 이제 이러한 믿음은 사라졌다.
1982년 전두환 정권에서 발행된 국정교과서에는 제5공화국을 '정의 사회를 구현하기 위한 모든 비능률, 모순, 비리를 척결하며 국민의 진정한 행복을 위해 민주 복지 국가 건설을 지향하고 있는 만큼 우리나라의 장래는 밝게 빛날 것이다'라며 낯뜨거운 찬양을 늘어놓았습니다. 당시 이 교과서의 연구진에는 김정배 고려대학교 교수가 있었습니다. 김정배 교수는 2015년 3월 국사편찬위원장으로 임명됐고, '역사교과서의 국정화와 검정제를 종합 검토하겠다'고 했습니다. 국정교과서를 집필하는 총 책임자가 이미 독재, 군사정권을 찬양했던 연구진이었다는 사실은 국정교과서를 반대하는 국민의 우려가 현실로 드러나는 증거이기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