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의 사람들은 변화를 이야기했다. 물을 얻고 나서 자신들의 삶이 어떻게 달라졌는지 말이다. 죽어가던 가축들이 생기를 되찾았고, 아이들이 마음 놓고 학교에 갈 수 있게 되었으며, 이제는 장장 6시간 동안 걸어 다니지 않아도 된다고 했다. "앞으로는 마을 젊은이들과 함께 케일, 양배추, 당근, 양파, 토마토 등을 심어서 수익을 창출할 거예요. 물만 있으면 4계절 농사도 문제없으니까요!" 더글라스는 신이 나서 이야기했다. '물이 존재한다는 이유만으로 사람들의 인생이 이렇게까지 달라질 수 있구나!' 나도 덩달아 즐거워졌다.
가뭄으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삶이 피폐하게 변하는지, 나는 똑똑히 목격했다. 기후변화는 누군가의 말처럼 그저 우스갯소리가 아니라, 사람들의 삶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단지 우리가 피부로 느끼지 못하고 있을 뿐. 지구 반대편에서 그 모든 고통을 온몸으로 감당하며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트럼프 대통령의 파리기후협약 탈퇴는 인도주의에 반하는 범죄라 할 것이다. 그러나 그 전에 나부터 돌아보자.
나도 한번 도전해보겠다고 호기롭게 나섰다. 그러나 끈을 머리에 얹는 순간 숨이 턱 막혀왔다. 조금씩 앞으로 발걸음을 내딛긴 했으나 다리가 휘청휘청 거렸다.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정신이 아득해졌다. 100걸음 쯤 걸었을 때는 거의 쓰러질 지경에 이르렀다. 결국 한 3분도 못 버틴 채 물통을 내려놓고 말았다. 이 무게를 지고 10km를 넘게 걸어가야 한다니. 이제야 아주 조금, 그들의 삶의 무게가 다가오기 시작했다. 나는 천천히 사라져가는 여인들의 모습을 물끄러미 지켜보았다. 그렇게 또 하루가 저물어갔다.
이러한 권력의 진공상태에서 가장 처참하게 파괴되는 것은 여성과 어린이들의 삶이다. 굶주린 아이들은 온갖 질병과 영양실조에 시달리며, 여성들은 조혼이나 여성할례와 같은 그릇된 풍습에 무방비로 노출된다. 삶의 환희는 사라진 지 오래고, 일상 곳곳에는 죽음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 있다. '살아간다'는 한 마디가 실로 어마어마한 무게를 지닌 곳. 바로 그곳으로 나는 향하고 있는 것이다.
친구들을 만나도 묻고, 가족들이 모인 자리에서도 묻는다. "공부는 잘해?" "몇 등이야?" "대학은 어떻게 할 거니?" 이어지는 질문에 어떤 답을 하느냐에 따라 인정받기도 하고 또 무시당하기도 한다. 누군가 나에게 공부를 잘하느냐고 묻는다면 결코 그렇다고 답할 자신이 없다. 나는 시험을 잘 보는 편이 아니고, 성적을 받아본 경험도 거의 없다. 기억력이 좋지 않기에 암기를 잘 못하고, 정해진 답을 맞히는 것엔 정말 형편없다. 그렇기에 나는 공부를 못한다. 우리 모두가 알고 있는 기준에 빗대어 본다면 말이다. 그러나 크게 낙심하지도 부끄러워하지도 않는다.
"진실을, 모든 진실을, 오직 진실만을 말하라. 바보 같은 진실은 바보같이 말하고, 마음에 들지 않는 진실은 마음에 들지 않게 말하고, 슬픈 진실은 슬프게 말하라." 르몽드의 창업자 위베르 뵈브메리가 평생 신조로 삼았던 문장이다. 1년이 넘는 기간 동안 르몽드를 읽으며, 나는 그 이상이 부분적으로나마 현실화될 수 있음을 보았다. 옳고 그름, 선과 악, 진보와 보수의 프레임을 넘어 배려와 나눔, 연대와 공존, 그리고 진실을 최우선으로 삼는 신문. 이러한 논조가 지속될 수 있는 까닭은 결국 매출 중 구독료가 차지하는 비율이 광고 수입을 훌쩍 뛰어넘기 때문일 것이다. 결국 르몽드는 언론인과 프랑스 시민사회의 구성원이 함께 만들어온 신문인 셈이다.
독일 학생들은 14세부터 정당에 소속되어 정치 활동을 시작할 수 있고, 16세에는 교육감과 지방의회 선거, 18세에는 연방의회 선거에 참여할 수 있다. 2002년 연방의회 의원에 당선된 안나 뤼어만은 이러한 시스템이 낳은 대표적 정치인이다. 그녀는 환경에 관심이 많아 10대 시절부터 녹색당에서 활동했고,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19세의 나이로 의원 자리에 오른 것이다.
285유로, 한국 돈으로 35만 원가량 되는 현금을 가지고 파리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88일간의 유럽 여행이 그렇게 막을 올렸다. 가난한 여행자였던 나에게는 두 가지 생존 전략이 있었다. 첫째는 최대한 돈을 아끼는 것. 그래서 무료로 숙박할 수 있는 곳을 찾아다녔다. 내가 즐겨 이용한 사이트는 소파를 찾아다닌다는 뜻의 '카우치서핑'으로, 현지인들이 집을 열어주고, 여행자들이 며칠 밤을 묵어가는 플랫폼이었다.
사실 전태일이 살던 당시에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지만, 노동자들의 요구는 그다지 달라지지 않았다. 전태일의 요구는 "근로기준법을 지켜달라"는 너무도 소박한 것이었다. 지금은 어떨까? 얼마 전에 철도 민영화 반대 투쟁을 벌이는 철도노조 위원장의 이야기를 들어볼 기회가 있었는데, 그분들의 요구도 전태일이 요구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매우 소박했다. 그분들의 가장 큰 요구는 "우리에게 노동기본권을 보장해달라"는 것이었고, 이 말은 곧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우리도 좀 사람답게 살자"라는 말과 일맥상통한다.
나는 태어나서 학교를 한 번도 다니지 않았다. 초등학교, 중학교, 그리고 고등학교까지. 남들이 걸어오지 않은 길을 걷는다는 사실은 종종 불안을 야기했다. 열일곱, 고등학교 1학년 나이가 될 무렵 이러한 불안은 감당할 수 없으리만치 극심해졌다. 앞으로 무엇을 공부해야 하지? 대학에 가야 하나? 아니, 그 전에 대학에 들어갈 수는 있으려나? 군대는 어떻게 하지? 학벌, 연줄 없이 한국 사회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까? 수많은 의문이 머릿속을 맴돌았지만 모두 공허한 메아리일 뿐이었다.
솔직히 나도 자신 없다. 만약 내가 서울대를 졸업하고 검찰에 들어가 부잣집 딸과 결혼할 수 있다면, 나름 정의의 검을 휘두르며 기업·정치인들을 줄줄이 기소할 수 있다면, 나의 지조와 신념은 돈과 권력 앞에 눈 녹듯 녹아내릴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래서 두렵다. 16년이라는 세월 동안 무한경쟁에 내몰려 끝내 그 승자독식의 법칙을 내면화하고 마는 학생들이. 오늘도 집, 학교, 학원을 오가며 성공만을 위해 질주하고 있을 젊은이들이. 강용석을 존경하고 이희진에 열광했던 그대들이. 설령 그렇지 않더라도 사회가 정해놓은 기준에 따라 숨죽이며 살아야 하는 우리들이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