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7년 대선을 앞두고 한나라당(현 새누리당) 이회창 비선조직이 북한에 판문점 총격을 요청한 사실이 드러났습니다. 당시 검찰은 한나라당 이회창 총재의 동생 회성씨를 중심으로 한 비선조직이라고 봤지만, 실제는 안기부가 깊숙이 개입한 사건이었습니다. 안기부는 1997년 대선에서 승리하기 위해 먼저 국내 재벌로부터 선거자금을 받는 일부터 시작했습니다. 이후 '오익제 편지 사건' 등을 통해 김대중 후보에게 '색깔론' 공작을 펼쳤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대선이 임박한 시점에 판문점에 총격 사건이 벌어지면 전쟁공포 등을 이용해 선거에서 승리하는 공작을 꾸몄습니다.
차은택은 한때 뮤직비디오의 모든 것이었다. 그의 이름에서 '미르재단'밖에 떠올리지 못하는 사람이라면 이 뮤직비디오들을 한 번 떠올려보시라. 1999년 모든 뮤직비디오 상을 독식하다시피 했던 이승환의 '당부'. 양조위와 전도연과 류승범이 소매치기로 등장한 '더 네임'(The Name), 장진과 김현주가 애틋한 사랑을 나누던 브라운 아이즈의 '벌써 1년'. 그가 박근혜 정부 아래서 맡은 직책들을 보라. 인천아시안게임 영상감독, 밀라노 엑스포 전시관 영상감독, 창조경제추진단장, 대통령 직속 문화융성위원회 위원.
대화와 협상에서 지혜로운 협상으로 가장 많이 거론되는 것이 윈윈(win-win)협상이다. 이번 8.24 남북합의는 윈윈 협상이기 때문에 칭찬받을 만하다. 그런데 남한은 원칙을 가지고 상대를 이겼다는 식으로 해석한다. 북한은 남한이 있지도 않은 일을 가지고 일방적으로 사태를 만들었다고 말한다. 모두 자신들의 강경책에 의해서 승리를 거두었다는 식으로 해석을 하고 있다. 협상의 결과를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해석하는 것이 인간사이기는 하다. 그렇더라도 윈윈 협상이라는 훌륭한 성과를 스스로 부정하는 것은 현명한 태도는 아니다.
북한의 '유감 표명'만으로 박근혜 대통령이 승리했으며, 원칙이 통했다고 주장하는 언론들이 있습니다. 북한의 대남 유감 표명 사례는 이번 말고도 많았습니다. 1968년 청와대 무장공비 사건이 벌어지고 몇 해 뒤인 1972년 북한을 방문한 이후락에게 김일성은 구두로 '대단히 미안한 사건이었다'고 사과했습니다. 판문점 도끼만행 사건 때는 판문점에서 북한 인민군 총사령관의 '사건이 일어나서 유감입니다.'라는 메시지가 대독됐습니다. '강릉무장공비 사건', '제2연평해전'.'연평도 포격' 때도 북한은 '깊은 유감을 표시한다'.'지극히 유감스러운 일이다' 등의 표현을 사용했습니다.
이병기는 자신이 몸 담았던 신군부의 전두환, 노태우 군부정권이나 김영삼의 이른바 문민정부가 끝나고, 자신이 모셨던 이회창이 두 번이나 대선에서 석패하였고 그 와중에 위와 같은 불미스러운 일들에 관여하였다는 의혹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다시 보수 측이 정권을 잡은 이명박 정부 때는 주일대사로 복귀하였으며 박근혜 정부에서는 국정원장을 거쳐서 청와대 비서실장까지 지내게 되니 이 역시 대통령 비서실장을 지내다가 3선 개헌의 무리한 추진이 문제가 되어 후퇴하였다가 주일대사를 거쳐 다시 중앙정보부장으로 복귀했던 이후락의 관운을 연상시킨다.
박정희는 쿠데타를 하면서 이른바 '혁명공약'을 발표했고 그 마지막에서 참신한 민간 정치인에게 정부를 이양하고 자신들은 군으로 복귀하겠다는 취지로 천명했었다. 그러나 박정희는 최종적으로 스스로 군복을 벗고 직접 정치에 참여함으로써 이런 약속을 어겼고("이 땅에 나같은 불행한 군인이 다시는 없어야 한다"는 드립을 전역식에서 치더니만 뒤로는 전두환과 노태우를 키웠;;) 군정 3년 간에도 여러 번 약속을 번복했다. 정부의 발표에 대한 국민들의 불신풍조가 본격적으로 자리잡게 된 것에는 박정희의 이러한 민정이양/군정연장 공약의 잦은 번복이(이승만의 서울사수 녹음방송과 함께) 가장 크게 기여한 것이 아닌가 싶은 느낌적 느낌이고 이게 박정희의 가장 큰 적폐; 중 하나라고 하겠다.
박근혜 대통령은 지난달 말 청와대 홍보특보에 김경재 전 의원을 임명하였다. 원래 재선까지 한 야당 인사이다가 지난번 대선에서 박근혜 대통령을 지원하면서 새누리당에 입당하였던 김경재 전 의원은 호남 출신이기도 하여 어찌 보면 여론이 영남 출신인 박근혜 대통령 측에 요구하여 왔던 탕평인사에 부합하는 인사일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김경재 전 의원이 유명해져서 국회의원이 되는 것에 어쩌면 가장 큰 도움을 주었던 경력이 이른바 [김형욱 회고록]의 집필자라는 것을 떠올려보면 그 집필자가 박정희의 딸을 대통령으로 홍보특보로 모시며 청와대에 들어가게 되었다니 좀 비감한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