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동안 검찰은 지배 권력에 기생하며 살아왔다."
"50개 대기업 인사 담당자 설문 조사에서는 '비슷한 조건이라면 남성 지원자를 선호한다'는 대답이 44퍼센트였고, '여성을 선호한다'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연합뉴스)" 책의 한 구절이다. 내가 만난 여성도 저 대목을 읽고 우울해졌다고 했다. 나도 그랬다. 어떻게 단 한 명도 없을 수가 있을까. 어떤 질문으로 구성되어 있을까 궁금해 하며 원본 기사를 찾아보았다.
정숙씨의 다양한 행보 가운데 그녀와 청와대 홍보담당자의 젠더감수성을 비판하기 위해 이번 간장게장 대접사건을 가져오는 것은 공정하지 못할 뿐 아니라 부당하다. 세상의 모든 사안을 이처럼 한 가지 기준으로만 보면 한반도가 전쟁의 위험으로 긴장하고 있는 심각한 상황에서 핵위협을 가하는 당사자의 성명서를 보고도 여혐이 없어 신선하다는 평가가 가능하다. 이런 의견이 차라리 농담이면 좋겠는데 진지하다.
'역지사지'는 굳이 진보가 아니더라도 공동체에서 보편적으로 강조하는 개념이다. 내가 당하지 않았더라도 타인의 고통을 내 일처럼 느끼는 감수성이야말로 인간을 인간이게 하는 필수덕목이라고 강조한다. 이재명 시장의 일갈에 시민들이 환호한 이유도 그것 때문이다. 한 편으로는 당해봐야만 안다는 정 반대의 주장 또한 대중의 환호를 받는다. 어떤 부류의 인간들은 애초부터 역지사지의 공감력이 작동하지 않으므로, 고통의 당사자와 똑같은 고통을 겪게 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나는 '역지사지'와 '너도 당해봐야 한다'는 주장에 대해 생각한다.
예술가는 가난해야 한다는 주장 만큼이나 가난한 예술가에게 특별한 지원이 필요하다는 주장도 설득력이 부족하다. 예술가에게 공적 자원이 투입되어야 한다면 어떤 이유일 때 정당할 수 있을까? 문화예술의 특수성? 문화강국을 지향하는 사회로서 의무? 같은 빈곤자인데 아시바를 설치하는 일용직 노동자는 받지 못하는 지원을, 그 무대에 서는 가난한 예술가는 받아야 한다면 어떤 이유에서인가. 예술 노동이 더 소중해서? 가치 있는 일이라서? 사회에 유익해서? 차라리 모두에게 기본소득 운동에 문화예술인들이 열심히 참여하는 게 설득력 있다고 생각한다.
누구는 여전히 주먹을 쥐고, 누구는 손을 잡고, 누구는 가만히 서서 각자 다른 모습으로 함께 부르는 임을 위한 행진곡. 투사가 되지는 못했고, 때론 비겁하게 살았을지라도, 내 삶을 지키는 데 급급해 눈 감은 적은 있을지라도, 그렇게 살다 문득, 그래도 함께 겪은 시대의 고통을 영 외면하지는 못한 평범한 사람들의 서사. 그런 이들이 촛불을 들었고 그 힘으로 5월의 정신을 계승한 정부를 만들었다. 역사의 한 장면을 만들어낸 동료시민들이기에 가질 수 있는 뿌듯함. 오늘 함께 운 사람들의 가슴에는 기쁨의 서사 하나가 새로 만들어진 셈이다.
누구나 변호인의 조력을 받을 권리가 있고, 쓰레기 같은 인간에게도 똑같이 보장되어야 하는 기본권 차원의 문제라고 주장한다면, 노조의 기본권이 파괴된 상황에도 문제의식을 가지는 게 일관되다. 갑을오토텍은 부당노동행위, 파업방해, 노조원 폭행, 노조파괴 등 노동조합과 노동자의 헌법상 기본권을, 매우 공격적인 방식으로 무력화시킨 노동기본권 파괴의 백화점 같은 사업장이다. 변호인으로서 조력받을 권리를 옹호한 기본권 보장차원의 행위니 문제없다고 방어하려면 이를 정확하게 이해해야 한다. 그것이 기본권을 대하는 일관되고 올바른 태도다.
태극기 집회에 나가는 걸 단순히 일당벌이로 보는 시선, 소외돼서 불쌍해진 존재들의 외로운 인정투쟁으로 보는 동정적인 태도 둘 다 동의하지 않는다. 혐오와 동정, 모두 자신의 분석틀에 대상을 맞추려는 태도다. 촛불을 든 자신은 신념에 의한 행동인데, 태극기를 든 노인은 일당 때문에, 혹은 삐뚤어진 사고 때문에 나온 좀비로 취급한다. 그 중장년, 노년들 개인이 자신의 정치적 의사를 가진 존재임을 인정하지 않는다. 나는 개인적으로 여성혐오보다 노인혐오가 더 심각하다고 생각한다. 여성들은 혐오를 개념화하고, 권리를 위해 투쟁할 수 있는 자기방어용 무기들이 있지만, 노인들은 그걸 가지지 못했다.
김대중 노무현 정부는 노동자들의 지지를 받았지만 그 지지가 임기 끝까지 이어지지는 못했다. 두 정권이 집권하는 동안 그는 실정이 있을 때마다 기뻐했다. 파병, FTA, 노동유연화 정책 같은 것에 반발이 일어날 때면 "그것 봐! 내가 그럴 거라고 했지! 지지했던 놈들 다 반성이나 하나?!" 하며 조금씩 신나했다. 먼저 알아본 자신의 선구안과 근본까지 꿰뚫어보는 심미안(?)을 은근히 과시하면서. 몇 차례 그런 장면을 보다가 나는 그에게 물었다. "당신이 원하는 게 세상이 좋아지는 건가요, 당신의 적이 실패하는 건가요? 당신은 세상의 변화를 위해 신념을 내걸고 운동하는 사람인데 좋은 세상을 만들겠다면서 세상이 나빠진 일에 왜 기뻐하나요?"
다니엘은 케이티의 성 노동을 아무리 힘들어도 인간이라면 하지 말아야 할 막장의 행위로 여긴다. 식료품 배급소에서는 그녀가 혹여 타인들 앞에서 비참해질까 봐 너의 잘못이 아니라고 위로해 주었는데, 성매매라는 케이티의 노동에 대해서는 타인의 시선으로 안타깝게 그녀를 바라본다. 다니엘의 안타까움은 순도 백 퍼센트 선의다. 그래서 케이티는 더 비참하다. 자신이 신뢰하고 소중하게 여기는 사람에게 들켜버린 치부, 그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한 미안함. 복잡한 마음이 얽힌다. 다니엘의 선의는 과연 그녀의 존엄을 지켜주는 걸까?
야당 의원들의 필리버스터를 두고 어떻게 해도 결국 표결로 질 게 뻔하다고 한다. 무용지물이라고도 하고 정치쇼라고도 한다. 결국 진다 해도, 사력을 다했지만 막아내지 못한다 해도, 이번 필리버스터는 천박한 말로 오염된 정치에서 품위 있는 언어를 건져냈고, 법의 논리를 조목조목 설명하는 입법자들의 기본 의무를 보여줬다. 나는 그들 중 하나가 읽어 주는 걸 들으며 헌법이 얼마나 아름다운 문장으로 구성되었는지를 새삼 깨달았다. 법안의 문제를 조목조목 설명하는 걸 들으면서는 그래 저게 정상이지, 모름지기 한 명 한 명이 입법기관인 국회의원이 저 정도의 식견은 가지고 있어야지, 한 동안 잊고 있었던 정상성이란 단어를 떠올렸다.
가장 많은 이용자가 보는 포털에서 수십만 명의 대중에게 이 웹툰이 보여진다는 사실, 케이블이 아닌 TV방송에서 수백만명 대중한테 이 드라마가 방영된다는 사실, 보다 노조 있는 방송사에서 제작되어야 한다는 원칙, 더 정의롭다고 평가받는 포털에서 연재해야 한다는 원칙이 더 중요한 것일까.실제 송곳을 그리면서 작가는 자본이나 보수진영한테 편향된 친노조 작품이라는 비난을 받을 거라 예상했다. 그런데 정작 오히려 우리편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꼬장꼬장한 원칙을 들이댄다. 송곳이 이럴 수 있나, 송곳인데 이러면 안 된다, 라는 말은 앞으로도 계속 나올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