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모두 씩씩해져 볼까?
이야기는 인간을 구원한다
그녀는 "반가워, 나도 페미니스트야"라고 말했다
너는 내게 엄마의 생리 주기와 날짜를 물었지. 생리 시작일을 계산해 주는 스마트폰 앱이 있다며 그걸 깔았다고 보여주면서 말이야. 그 안에는 이제 엄마와 네 주기가 사이좋게 들어있고 엄마는 우리가 동지가 된 양 뿌듯하고 자랑스러워. 그리고 나도 너에게 그런 존재가 되고 싶단다. 여성으로 함께 살아가고 연대하고 지지하는 사이로 말이야. 그리고 동지의 사이를 돈독히 하는 기분으로, 엄마는 네게 엄마로서의 당부의 말보다는 엄마가 너를 두고 하는 다짐에 대해 써 보고 싶어.
양손잡이 남자를 만난 적이 있다. 우연한 계기로 그가 남들과 손을 다르게 사용한다는 것을 우연히 알았다. 칠판에 글을 쓸 때에는 오른손을 사용했고 책 위에 메모를 할 때엔 왼손을 사용했다. 젓가락을 쥘 때에는 왼손을, 가위질을 할 때에는 오른손을. 도표를 작성하듯 그의 손 사용 행태를 정리하다 양손의 움직임이 능숙한 남자는 연인의 몸을 어떻게 다룰까 궁금해졌다. 저녁식사 중 그의 손을 바라보며 물었다. "사람의 몸을 만질 때도 어떤 규칙이 있어?"
이 사회 속 인간의 성장은, 부모의 가장 큰 영향력 속에서 결정된다고 믿어지고 이후에는 결혼 유무 및 출산 여부에 따라 일률적으로 평가된다. 결혼하지 않은 사람은, 언제나 미완의 상태이고 아이를 낳지 않는 것은 정신적 신체적 결함으로 여겨진다. 나라는 개인은 매번, 아빠의 딸에서 한 남자의 아내, 아이들의 엄마이어야만 제 구실을 다하는 듯 설명된다. 채워도 내내 부족한 채로, 미완의 삶을 어떻게든 제도의 틀 속에 완성시켜 보려고 애를 쓴다. 행복은 여기에 없고 저기에 있다. 부모의 따뜻한 사랑 속에, 바라던 상대를 만나 부부가 되었을 때, 아이를 얻었을 때, 보란 듯이 잘 키웠을 때 등등, 아무리 달려도 새로운 목표가 제시되는 경주와도 같다.
아이스케키를 하는 남자아이의 행위는 짓궂은 관심의 표현으로 해석되었다. 당한 여자아이는 적당히 소리 지르고 한 번 꼬집는 정도로 사태를 마무리하는 것이 관행이었다. 화가 나서 소리를 질러대도 주변 사람은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은밀하든 노골적이든 각종 성희롱을 받는 일은 일상이 되었다. 그나마 몇몇 사건이 사회적 이슈화되고 법적 대응이 늘어난다고는 하지만, '운 나쁘게 걸렸다고 믿을' 녀석을 조지는 것으로 상황이 축소된다는 인상을 받을 때도 있다. 상대방의 욕구를 배려하되 내게로 이끄는 과정을 습득하지 못한다면 나의 다가감은 폭력적 난입에 불과해진다.
당장은 자존심도 상하고 가슴도 아프다. 실연은 매번 그렇다. 그런데 참 신기한 건, 그때는 하늘이 무너질 것 같아도 어느덧 돌아보면 성큼 벗어나 있다는 데 있다. 염두에 둘 것은 있다. 섣불리 관계에 환상을 대입하지 않는다. 이 사람이야말로 평생을 기다려왔던 존재라고 믿어버리는 것과 같이. 평생을 기다릴 만한 존재는, 어쩌면 그 모든 관계를 통해 거듭날 나 자신이다. 거절당해도 괜찮다. 차여도 괜찮다. 만일 연애에 갑이 있고 강자가 있다면, 관계의 결과에 절박하지 않고 관계 자체에 정성을 다하는 사람이다.
이혼은 중대한 삶의 변화이자 결정이지만, 무작정 애도의 표현을 받아야만 하는 일은 아니다. 이혼했다고 해서 이전의 결혼 생활이 모조리 실패나 불행이라는 표식을 달아야 할 이유도 없다. 남편이 개자식이어서, 아내가 쌍년이어서 맞이하는 파경은 생각보다 드물다. 우리의 경우, 살다 보니 함께 하는 생활이 더 이상 즐겁지 않아졌고 그것을 넘어서 커다란 고통이 되었기에 내린 결정이었다. 오히려 이혼을 함께 받아들이게 되자, 차라리 해방감을 느꼈다. 이혼은 어쩌면, 고통에의 출구이기도 했다.
20대 초반부터 오십을 넘는 나이까지, 그녀들은 모두 엄마처럼 살고 싶지 않다는 소망을 품고 있었다. 엄마로 상징되는 여자의 삶은, 그들의 딸들에게 닮고 싶지 않은 서사이자 다시 쓰고 싶은 역사이기도 했다. 여자는 엄마의 딸로 태어나, 엄마를 닮지 않은 여자를 소망하며, 또 다른 엄마가 되고 싶지 않은 딸을 낳는다. 반복되는 고리 앞에 누군가는 눈물을 쏟고 누군가는 분노했다. 나를 비롯한 세상의 많은 여자는, 맞닿아서 애처롭지만 닮고 싶지 않은 어머니와 여성상 속에서 자라났다.
그리고 여기 21세기의 광활한 인터넷 공간에서 한 여자가 한 남자를 발견한다. 뉴욕에 사는 그녀는 서울에 사는 그 남자를 내일의 남자라고 불렀다. 두 도시에는 14시간의 시간차가 존재했고 대체로 그녀가 그를 떠올리는 저녁이면 그의 시각은 다음날의 아침이었다. 그녀는 그에게 어제의 여자였다. 달력상으로는. 페이스북을 채우는 수많은 얼굴들 중에서 왜 그에게 호기심을 느꼈는지는 자신도 이해할 수 없었다. 누군가에 들킬까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인터넷상에 올라온 그의 글을 찾아 읽었다.
리바운드 관계란, 주로 장기간 계속되었던 깊은 관계가 끝난 후 그 관계에서 벗어나거나 혹은 다시 돌아가기 위하여 갖는, 전 애인이 아닌 이성과의 새로운 관계를 일컫는다. 리바운드 관계를 맺는 사람들은 진지한 관계 사이 다시 튀어 오르는 공과 비슷하다. 그리고 그들을 상대하는 이성은 지상에 깔린 돌멩이나 보도블록쯤 되는 것이겠다. 그들은 이별의 상처를 치유하거나 무너진 자존감을 회복하기 위해 당신을 잠시 거쳐 가는 중이란 걸 알리거나 혹은 밝히지 않을 수도 있다. 언제나 그렇듯 관계에는, 원하는 것이 어긋날 때마다 피를 흘리는 자가 발생하기 마련이다.
이 두 가지의 현대 설화 속에서도 우리들의 오래된 강박관념은 드러난다. 남자는 여자에게 본능적으로 나쁘다. 그의 성욕은 좀처럼 길들여지지 않는 야수와도 같고 여자는 남자의 주체할 수 없는 욕망의 대상이 됨으로써 존재감을 확인한다. 그러나 그의 욕망은 언제든지 나 아닌 다른 여자를 겨냥할 수 있음을 모두가 알고 있다. 반면, 남자들의 서사 속 쌍년은 세상의 모든 여자들처럼 돈과 권력에 무너지는 나약한 존재이다. 그녀의 아름다움은 나보다 더 나은 남자를 찾아 떠남으로써 쌍스러움을 완성한다. 이는 오래도록 제기되었던 남녀의 진화론적 특성과 맞물린다.
이제는 잘 알고 있다. 말을 하는 행위를 두고 미리 허무해져서는 안 되었다고. 낯선 이에게 달려가 말을 걸듯, 매번 낯설어지는 당신에게도 달려갔어야 했다고. 계속해서 말했어야 했다고. 사랑은 표현하는 만큼 힘을 얻는다. 주문처럼 자꾸 우리 사이를 떠돌아야 하는 것들, 사랑의 말들. 다가오는 소리마저 사랑의 주문처럼 들리는 계절이 오고 있다. 입을 열어 주문을 읊조린다. 봄이 온다. 사랑이 온다. 이제 달려가 인사를 건넬 차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