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나갔다.
탈락한 의원 대부분이 3선 이상 중진 의원이다
세계화의 열풍은 왜 싸늘하게 식어버렸을까
광역단체장, 기초단체장, 국회의원 재보궐 선거 모두.
나는 경제와 노동문제를 따지기 좋아하지만, 세월호 참사 이후에 지도자를 뽑는 기준은 간단해졌다. 물론 나의 개인적 기준을 말한다. 첫째는, 세월호 참사를 막을 수 있는 사람, 그리고 그런 사고가 생기더라고 아이들을 구해낼 수 있는 사람이다. 인간에 대한 공감과 조직을 움직이는 능력을 가진 사람이다. 둘째는, 먹고 살려고 일하는 사람이 일터에서 죽는 일이 없도록 진력하는 사람이다. 역시 공감과 조직능력의 문제다. 이 둘을 관통하는 것은 인간에 대한 치열하고도 ("공감") 치밀한 ("조직능력") 존중이다. 이런 간단한 기준 때문에 나는 반기문을 반대한다.
통계청이 발표한 "2016년 10월 고용통계"를 보면, 실업률은 계속 오르막이고, 특히 청년실업률은 전년 동월 대비 최고 기록을 경신 중이다. 이제 어쩔 것인가. 정부가 가장 필요할 때 정부가 무너지고 있다. 대통령이 팔 걷고 나서서 경제에 대한 긴급수혈을 진두지휘해야 할 때 대통령은 저 깊고도 오묘한 "시크릿 가든"에 앉아 "내 잘못은 없으니 그대들이 알아서 하라"며 태업 중이다. 경제의 고통과 서민의 고단함은 보이지 않고, 제 자존심만 부둥켜 앉고 있다. 정치는 이미 망쳤다. 이제 기어코 경제까지 망쳐, '박근혜 불황'이라는 용어를 역사에 남기려 하는가. 조속한 퇴진만이 답이다.
싸워야 할 상대가 무당과 그 패거리라고 해서 우리가 무당이 될 필요는 없다. 하지만, 싸우다 보면 상대를 닮아가는 게 세상 일의 아이러니다. 조심할 수밖에 없다. 최순실 관련해서 "카더라"가 넘친다. 이판사판이라 특종을 노리는 언론의 기회주의도 있고, 그간 앞서서 열심히 파헤쳐왔던 "인기 언론인"도 "충격 특종"에 매달린다. 믿거나 말거나인데, 그러다 보면 졸지에 우리도 "선무당"이 된다. 몇 가지 사실을 얽어서 "그런 거 아냐?"를 반복하면 카타르시스는 될지언정, 진실을 밝히는 데 발목만 잡는다. 속 시원한 얘기 듣자고, "어두운 우주의 기운"을 다시 불러들이는 꼴이다.
왜 그럴까. 총을 맞고 칼에 찔리는 사람은 늘 이런 사람들이다. 국회의원이 되어서도 계급의 흔적은 남아서, 이튼 스쿨 출신은 아무리 과격한 주장을 해도 멀쩡하고, 조 콕스처럼 서민들 속에서 자신의 주장을 직접 전하는 평민 출신의 국회의원은 무방비다. 칼을 휘둘렀던 사람도, 그녀의 아버지와 같은 평범한 사람일 것이다. 죽음에 짙게 깔린 계급 문제, 나는 이제 그것이 두렵다.
투표장의 패배는 이렇게 오래전부터 예견돼 있었다. 그럼 이것이 끝인가? 적어도 지지론자들에게는 아니다. 투표 결과가 나오자마자 그들은 광장에 모여 '23%'라고 쓰인 큰 현수막을 건물 밖에 내걸면서 '희망의 첫걸음'을 경축했다. 그들의 판단은 허황된 것도 아니다. 찬반 여부를 떠나서 스위스 국민의 70%는 기본소득에 대한 투표가 또 있을 것으로 믿었다. 그 시간이 오기 전까지 기본소득론자는 투표함에서 얻은 어려운 숙제 더미 속에 파묻혀 구체적인 해답을 찾아야 할 것이고, 시민들은 기네스북 기록을 깬 세계 최대의 포스터에 적힌 질문을 두고 내내 행복한 표정으로 고민할 것이다. "(기본)소득이 해결된다면, 당신은 무엇을 하시겠습니까?"
젊은 남자가 지하철 일터에서 죽어갔을 때, 우리는 "노동자 살해"로 받아들이지 못한다. 죽음의 피가 마르기 전에도 그의 죽음에는 수많은 수식어가 붙는다. 막을 수 있었던 죽음은 사회의 책임이다. 그들을 사지에 보내지 않을 수도 있었고, 혹 그랬다고 해도 그들을 품에 껴안고 사회의 넉넉한 등짝으로 죽음을 막을 수도 있었다. 그걸 인정하는 게 그렇게 어렵나. 참, 우리는, 졸렬하다. 징그럽게 졸렬하다.
열심히 '근로'를 권하고 야근을 권하던 사회가 돌변했다. 일자리 창출을 위해 노동 개혁을 해야 한다는데, 그러려면 해고가 쉬워야 한다고 한다. 참으로 알쏭달쏭한, 바야흐로 '해고를 권하는 사회'다. 사회가 해고를 '권하는' 이유는 익히 아는 바다. 기업이란 부침이 있기 마련이니, 때때로 인력을 줄여야 할 불가피한 상황도 있다. 하지만 세상천지에 해고를 쿨하게 받아들일 사람은 없다. 얼핏 보자면 기업의 합리성과 노동자의 정서적 거부감이 맞부딪치는 듯하다. 결국 사회 전체적 이익을 해치게 되니, 사회가 나서서 해고를 '권하는' 것이다. 정부도 국익의 이름으로 하소연하거나 날선 말도 아끼지 않는다. 비합리적 개인을 위해 사회가 합리성을 권하는 형세다. 그런데, 과연 그런가.
IMF의 경제예측 모델을 예로 들어보자. 이 모델은 전세계 각국의 경제를 예측한다. 그만큼 복잡하고 수많은 전문가들이 동원된 모델이다. 그런데 경제위기를 예측하지 못했고, 이후에도 실패는 계속되었다. 경제위기가 터지자, 이 경제모델은 세계경제가 약간의 어려움을 겪겠지만 1년 뒤부터 회복기에 돌입한다고 했다. 물론 틀렸다. 2010년에 들어서는 기존 예측이 '낙관적 편향'이었음을 인정하고, 동시에 2011년부터는 경제가 반등한다고 예상했다. 다시 틀렸다. 그 뒤 몇 년 동안 계속 회복과 반등을 예측했으나 번번이 빗나갔다. 그동안 세계경제는 끊임없이 추락했다.
나는 벤담의 공리주의자는 아니다. 하지만 고색창연한 도덕이나 설익은 정의를 외치기보다는 개인의 구체적인 행복을 말하는 것이 정치의 도리라는 데는 동의한다. 행복이 추상적이면, 권력자의 도덕이나 정의 타령과 다를 바 없다. 행복은 벤담의 '침대의 기록'만큼 구체적이어야 한다. 그리고 루쉰의 희망은 그 자체로 정의되지 않는다. 절망과의 끊임없는 싸움일 뿐이다. 따라서 희망이란 싸우는 자만이 내뱉을 수 있는 말이다. 아마도 새해가 희망인 것은 또 다른 싸움의 시간이 우리에게 다가오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 당찬 여배우의 이름은 버네사 레드그레이브(Vanessa Redgrave)다. 그의 이름을 굳이 직역하자면 '붉은 무덤'인데, 이게 곧 그의 운명이었다. 그는 살아오는 내내 붉었고, 그 때문에 눈부실 수도 있었던 인생은 무덤 같은 구덩이였다. 젊은 시절 오스카 조연상까지 받으면서 붉은 카펫을 수놓았던 그를 제대로 기억하는 사람은 이제 많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