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불어민주당 지지율 하락과도 관련이 있다.
보수 민심이 표류하고 있어서다.
매 집회 참여자들이 늘어나고, 분노의 농도는 짙어지는데 왜 사람들은 폭력적 군중으로 변하지 않았을까. 왜 사람들은 품격을 잃지 않았을까. 물론 성숙한 시민의식 때문이긴 하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충분한 설명이 되지 않는다. 비폭력적 집회의 배경엔 이외에 몇 가지 인식적 요인과 사회문화적 요인이 자리하고 있다.
반전의 기회를 엿보고 있는 건 아닐까. 최순실 국정농단 사태가 불거진 후 나오고 있는 박 근혜 대통령의 대응은 매우 소극적이다. 갖고 있는 카드를 한 번에 내놓기보다는 하나씩 꺼내놓는 모습이다. 여전히 권력을 지키려 한다는 인상을 준다. 일정 기간이 지나면 대중의 동요가 잦아들고, 다시 지지층이 찾아와 국정의 주도권을 행사할 수 있으리라고 판단하고 있는 것 같다. 그렇지 않고서야 지금처럼 정치적 게임을 하듯 손에 패를 쥐고 있을 리가 없다.
2016 고령자 통계를 보면, 시간적·경제적 여유가 허락한다면 '여가에 관광하고 싶다'는 응답이 51.1%로 가장 많았다. 하지만 실제 '여가 때 관광을 한다'는 응답은 3.7%에 불과했다. 지난 1년간 공연, 전시, 스포츠를 한 번 이상 관람한 65세 이상 인구는 24.5%에 그쳤다. 복수응답을 받은 여가활용 방법에 대해선 'TV·DVD를 시청한다'가 83.1%로 가장 많았다. '그냥 쉰다'는 응답도 51.3%에 달했다. 예전엔 여가에 가족들이 함께했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다. 자녀와의 동거는 2014년 기준 28.4%였는데 이는 10년 새 10.2%포인트가 급감한 것이다.
사법부 내부를 국민이 들여다보기 어렵다. 국민 권리보호의 최후 보루라고 신성시해왔기에 세속의 눈으로 내부 메커니즘을 살펴보려는 시도도 적었다. 어떤 사람들인지,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는지, 어떤 행태를 보이는지 도무지 알 길이 없다. 정치가 나서 최소한의 견제를 해야 했지만 번번이 사법개혁 시도는 좌초되었다. 그사이 사법영역의 신뢰는 끝 모를 추락을 했다. 정의의 수호자인 검사와 판사의 이름들이 연일 뉴스를 탄다. 최근 법조계 비리 사건들이 외부로 알려진 것도 감시에 의한 것이 아니다. 관련자들의 내부 갈등과 배신 때문이었다. 만약 내부자들의 충돌이 없었다면 은밀한 권력들의 부정부패를 아무도 알지 못했을 것이다.
정부여당에 불리한 이슈들이 뉴스를 채우고 있던 상황에서 올림픽이 시작되면 선수들의 경기 관련 내용으로 바뀐다. 모든 언론이 스포츠신문이나 스포츠뉴스로 변하는 셈이다. 대중의 시선이 분산되면서 악재에 대한 집중도가 낮아지는 것이다. 실제로 2002년 월드컵 즈음 대통령의 아들이 구속되기도 했고, 직전에는 이른바 옷 로비 사건으로 정권이 타격을 받기도 했지만 월드컵이 충격을 어느 정도 막아주는 기능을 했다. 또 2008년 베이징올림픽은 이명박정부를 미국산 소고기 수입 논란과 촛불시위로 인한 위기에서 탈출하게 해주었다.
'저녁이 있는 삶'이 얘기가 되려면 야근이 많다는 문제 이전에 사람들이 안정적인 일자리를 갖고 있어야 한다. 그래야 그 말이 먹힌다. 하지만 고용률은 좀체 늘지 못하고 있다. 양질의 일자리는 축출되고 불량 일자리만 창출되고 있다. 안정된 일자리를 얻지 못하는, 얻었어도 언제 잃을지 모르는 불안 속에서 '저녁이 있는 삶'은 '먼 세상 얘기'가 될 수밖에 없다. 청년은 특히 심각하다. 6월 기준 청년실업률은 17년 만에 최고치였다. 17년 전이면 IMF 외환위기가 한창이던 때이다.
정치권 일각에서는 내각제와 이른바 분권형대통령제까지 주장하고 있는데 넘어야 할 산이 많다. 특히 내각제는 민주주의 원리에 더욱 부합하는 측면도 있지만 우리나라 사람들에게는 부정적 인상이 강하다. 실제 여부와는 무관하게 2공화국의 혼란이 내각제 때문이라는 교과서 교육을 받아왔고 내각제에서는 대통령을 직접 선출할 수 없기 때문이다. 권위주의 정권에서 빼앗겼던 대통령을 직접 손으로 뽑을 수 있는 권리를 피흘림으로 획득했는데 이를 국민이 순순히 내놓진 않을 것이다.
지역을 오해하고, 사람을 믿지 못했기 때문에 영남과 호남에서 주류 정당에 도전하려는 다른 정당이나 무소속 인물들이 지레 겁먹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하나의 정당만 옹호하는 배타적 지역주의는 이미 형체만 남고 실제로는 허물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사람들은 지역주의를 폐기할 마음을 오래전에 먹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수요자인 유권자 탓을 했지만 정작 책임은 공급자인 정당과 정치인에게 있었다. 그간 경쟁구도가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유권자들로서는 어쩔 수 없었다.
우리 사회가 보수의 절대적 우위라는 막연한 인식이 있었다. 그래서 특정 이슈를 두고 대립하는 국면이나 선거에서는 보수정당이 늘 승리할 수밖에 없다는 사고가 지배적이었다. 하지만 이번 20대 총선 결과, 이러한 인식이 여지없이 허물어졌다. 먼저 보수층은 균열이 절대 나타나지 않는다는 신화가 무너졌다. 보수의 아성인 영남에서 야당과 무소속으로의 이탈은 역대 어느 선거보다 컸다. 또한 고령 유권자의 투표의지는 최근 선거에 비해 약화되었다. 이는 수도권에서 여당 후보의 지지율이 40%선에 그치는 결과를 낳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