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당연한 사실도 증명해야 하나요?"란 질문을 받으면 저는 이렇게 되묻습니다. "증명할 수 없다면, 어떻게 그걸 당연하다 할 수 있을까요?" 공부가 익숙함에 맞서며 치열하게 의심하는 작업이라는 이야기도 학생들에게 전하려 합니다.
여성 전임교원을 늘리자는 주장은 성비를 억지로 맞추자는 게 아닙니다.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부자연스럽게 왜곡된 숫자를 자연스럽게 되돌리자는 이야기입니다. 운동장 바로 세우는 일을 더불어 해야 함은 물론입니다. 운동장 안에 가만히 있으면 그게 기울어져 있음을 알기 어렵습니다. 여성이나 타교 출신 교수 비율 등을 의식적으로 살필 필요가 그래서 있습니다.
문재인 정부는 이른바 과학기술 컨트롤타워를 국가과학기술자문회의로 일원화하려 합니다. 컨트롤타워가 총리급에서 대통령급으로 격상되는 것이니, 그만큼 정부가 과학기술을 중요하게 여긴다는 뜻이겠지요. 하지만 과학기술을 여전히 경제발전의 도구로만 본다는 게 문제입니다.
과거에 훌륭한 삶을 산 지식인이 말년에 이르러 당혹스러운 주장으로 구설에 오르는 경우를 이따금 보게 됩니다. 안타까운 모습입니다. 자신의 한계를 인식하는 게 얼마나 힘든지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지요. 리영희 선생의 절필 선언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선생이 훌륭하니 그대로 따르라고만 한다면, 보통 사람에겐 비현실적인 조언이겠지요. 마치 어설프게 쓰인 위인전처럼 별 도움이 되지 않을 것입니다.
성경을 문자주의적으로 해석하며 그걸 과학적 사실이라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예컨대 지구의 나이가 6000~1만2000년이라는 식입니다. 창조과학자로 불리는 이들입니다. 그들은 과학적으로 입증될 수 없거나 이미 반증된 이야기를 과학적 사실이라 고집하며, 과학공동체가 인정하는 이론들을 부정하고 있습니다. 창조과학은 형용 모순입니다. 과학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개인 생각을 밝힐 자유는 물론 존중합니다만, 정확한 단어를 써달라고 요청할 순 있으리라 여깁니다.
탈원전 문제를 시민과 전문가의 대립으로 몰고 가는 이들이 있습니다. '탈원전', '전문가', '시민'을 묶어서 검색해보니, '탈원전은 시민이 아니라 전문가에게 맡겨야 한다'는 식의 기사가 눈에 꽤 띄더군요. 안타까웠습니다. 그렇게 분리돼선 안 되리라 여겼던 까닭입니다. 탈원전엔 과학적, 공학적, 사회경제적, 윤리적 문제 등이 서로 복잡하게 얽혀 있어, 한 사람이 모든 문제의 전문가일 수도 없습니다. 게다가 원자핵발전 전문가와 탈핵 활동가 가운데 누가 원전 없는 세상을 더 많이 상상해왔는지 헤아리면, 탈원전의 전문성이 어느 쪽에 더 있는지 따지기도 그리 간단치만은 않습니다.
시대에 따라 상황과 맥락이 바뀌고 그로 말미암아 판단이 조금씩 달라지기도 합니다. 하지만 기존 벽돌과 새 벽돌 사이의 관계를 명확히 해야 한다는 원칙엔 변함이 없습니다. 서울대 연구진실성위원회는 김상곤 교육부 장관의 1992년도 박사논문에 연구 부적절행위가 있었다고 판정했습니다. 학위를 취소할 정도의 연구 부정행위는 아니라 했습니다. 부적절행위도 잘못은 잘못입니다. 김상곤 장관의 성찰이 필요해 보입니다. 그렇지만 이 일로 그의 교육부 장관 후보직 사퇴를 요구하는 주장엔 동의하기 어려웠습니다.
문빠라는 단어는 모호합니다. 문재인 대통령의 열정적 지지자를 가리킬 수도 있고, 별생각 없는 맹목적 지지자를 일컬을 수도 있습니다. 둘은 의미가 꽤 다릅니다. 맹목적 지지자라는 뜻이었다면 대상을 비하한 셈이겠고요. 어떤 판단으로든 설득이 목적이라면 쓸 이유가 없는 표현인 듯합니다. 또 한겨레를 한걸레라고 하는 순간, 촛불 시민의 곁을 줄곧 지켜왔던 한겨레는 청산의 대상으로 전락하는 셈이 되겠지요. 적어도 그건 아니지 않겠습니까? 새날을 꿈꾸며 같이 촛불을 들었던 사람들끼리 서로 너무 상처 주지 않으면 좋겠습니다. 한겨레도 더 겸손해지길 기대해봅니다.
군대 내에서 허용하지 않기로 합의할 수 있는 건 섹스지 사랑이 아닙니다. 저는 '군대 내 동성애 금지'라는 표현이 부적절하다고 봅니다. 하지만 '군대 내 성행위 금지'엔 동의할 수 있습니다. 이성끼리든 동성끼리든 말입니다. '군대 내 성행위 금지'를 '군대 내 동성애 금지'라 일컫는 건 정확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옳지도 않습니다. 형용모순이자 차별적 표현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정명(正名)을 생각합니다.
연구자는 대개 정부나 공공재단, 기업의 후원을 받습니다. 그런데 사회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지니면서도 국가나 기업이 연구비를 대기가 여의치 않은 과제도 있습니다. 사업성을 먼저 따질 수밖에 없는 기업이나 소수자 문제를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 현 정부 정책의 한계를 떠올리면, 트랜스젠더 건강 연구가 그런 사례가 아닌가 싶습니다. 김승섭 교수의 트랜스젠더 건강 연구는 국가의 지원을 받지 못했습니다. 김 교수는 시민들에게 직접 호소해보기로 하였습니다.
시민혁명의 완수에 청년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있길 바랍니다. 철 지난 옛 경험에서 자유롭고 상상력과 학습능력이 풍부한 이들이 새 정부를 세우는 주역이 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제가 학생들에게 강조하는 '의도적 비움'은 사실 저 자신에게 하는 조언이기도 합니다. 제 또래의 기성세대에게도 전해봅니다. 마치 고장 난 나침판처럼 흔들림 없이 고정된 과거의 시선이 미래세대에 부담을 주지 않도록 말입니다. 학습하지 않는 자의 오래된 경험은 약이 아니라 독일 수 있습니다.
헌법엔 과학이 두 번 등장합니다. 제2장(국민의 권리와 의무) 제22조 2항엔 '저작자·발명가·과학기술자와 예술가의 권리는 법률로써 보호한다'라 적혀 있습니다. 그리고 제9장(경제) 제127조 1항에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국가는 과학기술의 혁신과 정보 및 인력의 개발을 통하여 국민경제의 발전에 노력하여야 한다.' 헌법에선 과학이 기술과 분리되지 않은 채 경제발전을 위한 도구로 존재하는 것이었습니다.
얼마 전 JTBC 기자가 정유라씨의 소재를 경찰에 알리고 체포 장면을 취재한 바 있습니다. 논란이 일었습니다. 훌륭한 방송사의 기자가 선의로 좋은 일을 했으니 괜찮다 할 수도 있겠지요. 그럼 극우 언론사의 기자가 수배 중인 해고 노동자를 뒤쫓다 자신의 신념에 따라 경찰에 알리는 경우는 어떤가요? 기자의 가치관이 판단의 기준일까요? 간단치 않습니다. 시민으로서 신고하고 기자로서 취재한 제이티비시 기자의 선택이 정당했다 하더라도, 제기된 문제는 그 자체로 중요한 의미가 있겠다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