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통 사단급 법원에서는 사단장이 관할관이라는 이상한 직책을 겸하고 있다. 이 직책은 도대체 무엇인지 알 수는 없지만 군사법원 사무에 대한 지휘·감독권을 가지고 있다. 즉, 법원 판결에 장군들이 관여할 수 있는 것이다. 관할관은 특히 관할관 확인 때 형을 감경을 할 수 있는 비교할 데 없는 이상한 권한을 갖고 있다(군사법원법 제379조). 이런 것은 민간법원의 판사는 물론 대법원장도 갖고 있지 않은 권한이다. 사단장이 군사법원의 판결을 임의로 고쳐 깎을 수 있는 것이다. 내가 쓰고도 믿기지가 않는다!
전문화를 통한 정예 강군으로 거듭날 수 있다. 현재 우리나라 군대의 사병은 독립된 지위와 인격을 인정받지 못하는 인간 부품의 상태를 면치 못한다. 사병 복무로 얻은 지식과 경험은 제대 후의 사회 활동에서 자산이 되지 못한다. '군에서 썩는다'라는 냉소적 표현이 국민적 공감을 얻는 이유가 있다. 군복무 중에 쌓은 경력은 전역 후에도 자산이 되도록 하려면 모병제로 전환해야 한다.
2016년 4월 16일 안산 세월호합동분향소에서 제단에 바쳐진 투표확인증을 보았다. 그 투표확인증은 생존학생이 희생된 친구에게 보여주는 다짐이며, 희망이었을 것이다. 유권자들이 국회의원과 대통령에게 허락한 것은 그들만의 권력이 아니라 국민을 위해 일할 자격이다. 그들이 제대로 일을 하도록 감시하는 주체는 국민이고, 미래의 주인이 될 청소년과 청년 들이다.
지난 2014년 구타 및 가혹행위로 사망한 윤 일병의 2주기가 불과 한 달도 남지 않은 지금, 같은 28사단(사단장 김승겸 소장, 육사 42기)에서 또 다른 병사가 부사관에게 폭행당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더욱 심각한 것은, 이번 사건의 가해자 역시 지휘관과 헌병대의 봐주기식 처리 하에 아무런 형사처벌 없이 전역했다는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이번 사건을 담당한 헌병대장 이 모 중령, 수사과장 이 모 준위, 수사관 김 모 씨가 사실 과거 윤 일병 사건을 담당했던 인원들이라는 것이 밝혀져 충격을 주고 있다.
지금까지도 너무나 선명하고 뚜렷이 기억나는 규칙들. 일병 때까지 혼자 담배를 피울 수 없었고, 상병 때까진 거울을 봐서도 안됐다. 스스로 부대 밖을 걸어나가려면 병장이 되어야만 했다. 한도 끝도 없는 규칙들은 매일 같이 구타를 양산했고, 동시에 군생활의 유일한 낙을 제공했다. 권리를 하나 하나 성취해 나가는 군생활. 온갖 고난으로 각자가 쟁취해 낸 권리는 예외를 용납할 수 없었다. 우리는 귀신을 잡지 않았다. 시스템을 지켜 짬밥과 권리를 얻었고, 점점 커져 나가는 권력의 달콤함은 군대 밖 사회라고 다를 게 무엇인가.
독일어로 병역거부자는 '전쟁저항자'란 단어로 불린다고 한다. 한국에서 병역거부 운동 초창기에 '양심'이란 단어를 두고 "군대 가면 비양심이냐"는 논리에 막혀 애먹은 걸 생각하면 차라리 전쟁저항자란 표현이 훨씬 본래 의미를 명료하게 담아낸다는 생각이 들었다. 전쟁저항자라고 쓴다면 병역거부 단어 자체에서 으레 병역의무를 수행한 남성을 먼저 떠올리게 되는 측면도 피할 수 있을 것 같다. 또한 지금 한국 병역거부 수감자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여호와의증인' 신도들과도 구별할 수 있는 단어인 것 같아 여러모로 마음에 들었다.
"전문대 졸업이면 아예 일자리도 별로 없는 데다가 많은 기업이나 정부기관은 "병역"을 취업 조건으로 규정하고 있잖아요. 병역을 거부하면 거의 같은 기간을 감옥에서 보내야 하고 출소 후에는 '전과자'가 됩니다. 전망이 없는 한국 사회가 원망스러웠고, 그런 한국 사회에 충격을 주기 위해서는 국외로 탈출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게 됐죠. 아버지는 육사를 나온 전직 직업 군인이셨는데 "니가 결정한 것이라면"이라고 하며 별로 말씀을 안 하셨지만, 어머니는 강하게 반대하셨습니다. "무조건 참아! 군대 가!" "감옥에 2년 가면 다시 만날 수 있잖아"라고 통곡하셨죠. 하지만 결국은 항공권과 생활비를 어머니가 마련해주셨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