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올게요"-제이쓴
하늘로 총을 쏜 순간, 실탄이 발사됐다.
'깐부 할아버지'로 불리는 오영수
이 프로젝트의 이름은 '이웃에 영웅이 산다'이다.
전무후무한 고속 경제성장을 경험한 대한민국에서 살아가는 이상, 꼰대짓을 맞닥뜨릴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의 기성세대는 '노오력'을 통해서 삶의 질이 급격하게 좋아지는 것을 경험했고, 합리적 확률 계산에 익숙하지 않은 인간은 이때의 경험으로 세상을 바라볼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경제학자인 저는 꼰대짓마저 수요와 공급의 틀을 통해 이해합니다. 수요공급 이론에 따르면, 꼰대짓의 거래량은 수요와 공급이 만나는 지점에서 결정됩니다. 꼰대짓의 공급이 그치지 않는 이유는 꼰대짓에 대한 수요가 존재하기 때문이라는 설명입니다. 실제로 꼰대식 사고로 가득한 강의와 글에도 많은 사람은 공감과 존경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80년대 초반 광주의 진실을 두고 전두환 독재정권과의 전면적 싸움이 벌어지고 있을 때 내가 가장 듣고 싶었던 목소리 중의 하나가 작가 황석영의 그것이었던 것도 그러고 보면 이상한 일은 아니었을 테다. 전태일이 점화한 70년대 노동운동과 민주화투쟁의 새로운 국면에서 황석영이 「객지」 「한씨 연대기」 「삼포 가는 길」 「돼지꿈」 등 일련의 작품으로 그려내고 포착한 민중 현실의 생생한 모습과 포괄적 인간 진실의 힘은 문학의 울타리를 넘어 저항과 변혁의 은밀한 심지가 되고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렇다면 80년대 초 그 급박한 시절에 그는 어디에 있었는가. 황석영의 자전 『수인』은 내게는 꼭 그 질문에 대한 응답처럼도 보인다.
상대적 진보 성향 후보가 자신이 군 경력에서 보수 후보에 뒤지지 않는다고 강조하고 나서며 보수 유권자들에게 어필하려고 한 건 실은 문재인 후보가 처음은 아니다. 2004년 미국 대선에서 당시 아들 부시 대통령에 맞섰던 존 케리 당시 미국 민주당 대선 후보도 지금 문재인 후보처럼 자신의 군경력을 강조하는 선거 캠페인을 펼쳤다. 그러나, 결론부터 말하자면 결과는 대폭망이었다. 왜 때문에 존 케리의 군경력 강조 선거캠페인은 실패했을까? 출발은 우연이었다.
또 다른 소녀들이 있다. 한국의 남자들도 이 죄악에서 자유롭지 않다. 한국군이 월남전에 참전하는 동안 저질렀던 이런저런 만행들을 우리는 이미 모르지 않는다. 한국의 소녀상이 중국 소녀상, 일본 소녀상, 베트남 소녀상이기도 할 때, 그 소녀상은 아베 같은 인간들이 돈다발 따위를 들고 감히 넘볼 수 없는 어떤 높이와 넓이를 얻을 것이다. 한국 소녀에게 참으로 절실하고 엄숙한 문제는 만국의 소녀들에게도 절실하고 엄숙한 문제다.
얼마 전. 지난 16년간 나를 위로해 주고 지켜 주었던 내 강아지 토토가 무지개다리를 건너가 버렸다. 토토가 치매 현상을 보이기 시작하면서부터 나는 토토를 돌보기 위해 거의 아무 일도 할 수가 없었다. 짐승도 나이가 들면 사람이 노환을 앓는 것과 똑같다는 것이 굉장히 핍진한 슬픔을 환기하고 있었다. 토토는 머리를 요란하게 흔들고, 정처 없이 헤매며, 어두운 구석으로 처박히듯 들어갔다가는, 이윽고 함정과 늪에 빠진 것처럼 되돌아 나오질 못하고 있었다. 누구는 안락사를 시키라는 소리도 했다. 그러나 백번을 양보해 그것이 나와 토토를 위하는 말일지라도 무조건 절대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만약 그런 짓을 한다면 나의 나머지 인생이 어떠할지 나는 잘 알고 있었다. 책임을 다하지 않은 인생은 결국 망한다.
'동료 며느리'들과 나눈 이야기는 이런 내용이었다. 처음 남자친구 집에 인사드리러 간 날 '설거지를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하는 스스로를 보며 '결혼을 꼭 해야할까' 생각했다는 것, 아침은 먹고 출근하느냐는 질문에서 남편 밥 잘 차려주라는 질책이 느껴진다는 것, 벨을 누르지 않고 비밀번호로 들어오시는 게 침입처럼 느껴진다는 것, '남편이 바쁘면 너라도 시댁에 오너라'라는 말이 느닷없는 사장님 호출만큼이나 어리둥절하다는 것, 예비 시어머니가 '네가 그렇게 늦게까지 일하는데 결혼하면 내 아들 밥은 차려 주겠냐?'고 말해서 애인과 헤어진 친구도 있다는 것. 요즘 세대 여성들의 생각이 이렇다는 것을 어머니 세대들은 짐작조차 못할 것이다.
1967년 4월 28일 소환장을 받은 알리가 휴스턴의 신병 집결지에 나타났다. 이들은 신체검사를 마친 뒤 루이지애나 기지로 이동해야 했다. 그 자리에 모여든 신병들은 모두 26명. 군 장교는 무하마드 알리 대신 캐시어스 클레이를 불렀다. 클레이 아니 알리는 대답을 하지 않았다. 거듭 이름이 호명되고 징집을 거부할 시 5년 이하의 징역에 처해질 수 있다는 경고가 발해졌으나 무하마드 알리는 끝내 입을 열지 않았다. "나는 당신들이 아니라 내가 원하는 챔피언이 되겠다. 베트콩은 우리를 검둥이라고 욕하지 않는다. 베트콩과 싸우느니 흑인을 억압하는 세상과 싸우겠다" 1967년 4월 28일, 떠벌이 알리는 행동하는 알리로 우뚝 섰다.
인간을 도구로 삼는 사회는 당연히 강자에게만 유리한데도, 국민의 다수는 먹고살기 위해 순응하고 동화된다.
운전대만 잡으면 끼어드는 차를 향해 평소엔 하지도 않던 욕설을 쏟아놓는 것도 비슷한 맥락이다. 도로 위는 목숨이 달려있는 곳이니까 그만큼 민감한 거라고 말 하지만, 실은 눈앞에 보이는 것이 사람이 아니라 차라서 더 쉬워질 뿐이다. 비인간화는 그렇게 사람이 보이지 않으면, 혹은 다른 인종 다른 언어를 향해 더 수월해진다. 자기 나라에서는 제아무리 학식이 뛰어난 외국인도, 더듬거리는 한국말로 말하고 있으면 그저 귀여워 보일 뿐이다. 제국주의를 그린 수많은 영화들 속에서,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로 떠드는 원주민들이 주인공의 눈에는 낯선 동물과 다를 바 없는 것도 그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