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기생충'이 보내는 신호를 해독하는 방법
어느 장면에서는 ‘곡성‘을 연상하게 한다.
다양하고 미묘한 이슈를 담담하게 보여준다.
아마도 해방 이후에 출간된 한국문학(일본어로 쓴 한국문학을 포함한)의 가장 중요한 업적 중 하나로 꼽힐 만한 걸작인 〈화산도〉는 한국의 유수하다는 문학출판사에서 출판되지도 못했다. 그리고 작품의 완역본이 몇 년 전 출간된 뒤에도 내가 알기로 주요문예지 어디에서도 제대로 된 평문으로 거의 다루지 않았다. 작가의 성취에 걸맞은 국내의 명망 있는 문학상을 수여하지도 않았다. 아마도 짐작컨대, 일본어로 쓴 김석범 문학은 '한국'문학에 포함시킬 수 없다는 판단이 작용했을 것이다.(그런 점에서 김석범 문학은 역설적으로 한국문학의 경계와 의미를 묻는 역할도 한다)
위대한 삶에서 반드시 위대한 문학이 나오는 건 아니다. 세상사가 그렇게 단순하지는 않다. 문학의 수련은 단지 삶의 경험만이 아니라 오랜 기간의 훈련, 특히 언어와 사유의 훈련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졸렬한 삶에서 위대한 문학이 나오는 법도 또한 없다. 그런 경우가 있다면 알려주시라. 내 판단으로는 미당은 그런 예가 될 수 없다. 내가 되풀이해서 미당의 삶은 비록 치욕스러웠지만, 그의 시가 아름답고 뛰어나다고 옹호하는 이들에게 그런 주장의 구체적 근거를 요구하는 이유다. 어떤 점에서 미당 시는 빼어나며, 한국 시의 역사에서 일종의 전범이 될 수 있는가. 그의 시가 아름답다면 그 아름다움의 근거는 무엇인가. 그의 삶과 시의 관계는 무엇인가.
아름다움은 곧 자신과 세계에 대한 정확한 인식과 파악의 깊이다. 빈약한 사유를 가리는 미사여구를 구사하는 것, 기발한 표현과 문장을 창안하는 것, 독특한 비유법과 상징법을 사용하는 것이 아름다움의 몸체가 아니다. 물론 그런 것들도 포함된다. 말을 갖고 노는 재주는 시의 중요한 구성요소다. 그러나 이런 '언어적 장치'들은 아름다움의 곁가지다. 아름다움은 곧 깊은 앎의 문제다. 미당시는 그런 아름다움에 이르는가. 그렇지 못하다. 나는 한국문학의 큰 공백으로 (문학적) 지성의 빈곤을 지적해왔는데, 미당시도 예외는 아니다. 참된 아름다움은 깊은 지성의 다른 표현이다.
이 영화가 '영화'로서 좋은 영화인가. 이런 답변이 있다. "옳은 주제를 지닌 영화가 옳은 것은 아니고, 옳은 생각을 하는 이의 영화가 옳은 것도 아니며, 오직 자신의 형식으로 옳다고 느껴지는 자리에 올라 있는 영화만이 옳다. 영화의 사회적 가치와 영화적 성취를 혼동한 나머지, 한 편의 영화에 자신의 사회적 정의감을 온전히 의탁하려 해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정한석 평론가) 이 주장에는 영화 '군함도'를 평가하는 일종의 기준이 들어있다. 어느 영화 혹은 문학이 좋고 안 좋고의 문제는 그 영화가 내세우는 "사회적 정의감"(항일 민족주의 등)의 유무가 아니라는 것. 영화의 좋고 나쁨은 그만의 고유한 "형식"을 통해 거둔 성취로만 평가된다는 것.
구출을 기다리는 병사들의 행렬, 공습해오는 독일 전투기. 스러져가는 병사들. 특히 항공 전투장면은 할리우드 영화가 신물 나게 보여주는 특수효과와 스펙터클에 기대지 않으면서도 어떤 감흥을 줄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인물들과 공간의 배치에 대한 감각, 그 감각에서 독특한 미장센을 제시하는 능력에서 놀란 감독은 뛰어나다. 영화가 단지 인물만이 아니라 공간과 장소의 예술이라는 걸 잘 보여주는 영화다. 영화에 대사는 거의 등장하지 않으며, 거의 행동과 표정으로만 상황을 제시한다. 그걸 통해 긴박한 영화의 리듬을 창출한다.
교육부의 잘못된 갑질정책이 본격적으로 시행된 건 MB정권 때부터였다. 재정지원을 무기로 총장직선제, 학장선출제를 교육부가 원하는 간선제로 강압적으로 변경했고, 일방적인 성과연봉제 도입을 비롯한 다양한 국립대 통제정책이 실행되었다. 총장/학장 직선제든 간선제든 장단점이 있다. 문제는 대학구성원들이 자율적으로 결정해야 하는 대학거버넌스 문제를 교육부의 압력으로 결정하게 만들었다는 점이다. 쉽게 말해 '말 안들으면 돈 주지 않겠다'는 것. 교육부의 입맛에 따라, 대학의 블랙리스트와 화이트리스트가 만들어졌다. 그때부터 국립대는 망가지기 시작했다.
대의민주제가 현실적으로 힘을 발휘하는 대중민주주의 시스템에서 선거와 투표는 주권자가 주권을 행사하는 유일한 방도는 아니지만, 매우 유력한 통로이다. "투표는 탄환보다 강하다"(링컨)라고 말하는 건 분명 과장이다. 그러나 투표의 힘을 과소평가해서도 안된다. 이번 선거에 적극 참여할 것을 제안하면서 내 강의의 수강생들에게 했던 말이다. "여러분이 지지하는 후보에게 투표하라. 최선의 후보가 없으면 차악의 후보를 선택하라. 정치인들은 입만 열면 국민을 말한다. 입발린 소리다. 잊지 말라. 정치인들은 국민 일반에 관심 없다. 그들은 오직 투표하는 유권자만을 두려워한다. 여러분의 목소리를 저들이 듣게 만들려면 투표해야 한다."
자신의 집으로 돌아오면서, 탄핵된 위임권력은 이렇게 말했다고 전해진다. "시간이 걸리겠지만 진실은 반드시 밝혀질 것입니다." 무슨 의도로 말했는지 짐작이 가지만, 나는 이 말을 애써 선의로 해석하고 싶다. 앞으로 다양한 경로를 통해 "진실"은 "반드시 밝혀질 것"이다. 그렇다면 그 "진실"을 명확히 밝히고 엄중한 책임을 묻기 위해 사법기관은 철저하게 수사해야 한다. 어떤 의혹도 남겨서는 안된다. 그렇게 "진실"이 만천하에 명명백백하게 드러난 다음에야, 그때 비로소 시민들은 용서와 화해의 가능성을 생각할 것이다. 그러기 전에 정치인들이나 언론이 나서서 '국민통합' 운운하며, 섣부른 용서와 화해를 주장해서는 안된다.
한 정치인의 "됨됨이"나 그릇은 권력의 자리에 있을 때만큼이나 어떤 자리에서 물러날 때 드러난다. 그점에서 반씨의 퇴임사는 얼마전 대선 경쟁에서 물러난 모 시장의 그것과도 비교된다. 한 사람은 경쟁에서 물러나면서도 남 탓을 한다. 다른 사람은 자기 탓을 한다. 그들의 속마음이나 "진면목"이 무엇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시민들은 남 탓하는 정치인을 신뢰하지 않는다. 그점에서 반씨는 물러나는 순간까지도 큰 정치적 실책을 했다. 자신이 정치적 아마추어에 불과하다는 걸 대중에게 여실히 드러냈다.
세월호 참사도, 국정농단도, 헌정훼손도, 사태의 본질에 대한 이성적 논증과는 거리가 먼 '종북'이니 '빨갱이'니 하는 이념적 프레임의 전쟁터로 만들려는 시도가 계속 발생한다. 지금도 벌어지고 있는 일이다. 거기서 시민적 양식과 "이성"은 설 자리가 없다. 그래서 아이를 잃고 단식 농성 중인 부모들 앞에서 '폭식투쟁'을 하는 짓이 벌어진다. 나라를 팔아먹는다고 해도 특정인과 세력을 맹목적으로 '묻지마 지지'하는 일이 벌어진다. '묻지마 지지'와 '묻지마 비판'은 민주주의의 덕목과는 거리가 멀다. 매사에 '너는 누구의 편인가'를 따지고, 그를 통해 이념공세를 펼치고 자기편을 규합하려는, 자기편이 아니라면 '밥줄'도 끊어야 한다는 식의 '빨갱이' 사냥이 벌어진다.
저들을 비난하는, 저들의 어리석음과 악함을 비난, 비판하는 숱한 말들을 읽는다. 물론 나도 공감한다. 당연히 화가 난다. 그러나 내 생각에 그런 비난은 저들과의 싸움에서 별 도움이 안된다. '악'을 비난한다고 악이 변화하고, 어리석은 자를 비난한다고 그들이 달라지는 걸 나는 현실에서나 문학에서나 거의 본 적이 없다. 이런 질문은 해본다. 지금까지 해온 것처럼 광화문 광장에 모여 100만이 퇴진을 외치는 것이 최선일까. 국회가 시민들의 뜻을 무시하는 것에 어떻게 효과적으로 대응할 것인가. 현 시점에서는 광화문집회와는 별개로, 여의도와 각 지역에서 국회의원을 상대로 탄핵을 압박하는 것이 효율적이지 않을까.
내가 생각하는 대의민주주의의 딜레마 중 하나. 시민의 평균적인 양식과 지적 수준, 판단력에 훨씬 못 미치는 유아론자들이 국가의 지도자가 되고, 권력의 자리에 올라가는 일이 빈번하게 발생한다는 것이다. 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면 앞으로도 또 다른 '아몰랑'이 출현할 것이다. 주권자인 시민들은 그들이 남기고 도망간 "쓰레기"를 치우느라 고통받을 것이다. 평균적인 수준의 시민적 양식과 지적 수준, 판단력을 뛰어넘는 탁월한 지도자까지는 바라지도 않는다. 그건 사치스러운 욕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