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감 가는 이야기들이 가득 담겨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작가 김민정씨는 “소설의 처음부터 끝까지를 그대로 투고한 명백한 도용"이라고 지적했다.
95년 뒤 100년간 키운 나무로 출판된다.
세계일보 신춘문예 시 부문 당선작이 표절 논란 끝에 당선 취소됐다
세 번 읽었다
‘포토 리얼리즘’이 아니다. ‘하이퍼 리얼리즘’이다.
대법원이 원심을 확정했다.
장강명은 문학상을 네 번 탔다.
창의력이 엄청나다.
80년대 초반 광주의 진실을 두고 전두환 독재정권과의 전면적 싸움이 벌어지고 있을 때 내가 가장 듣고 싶었던 목소리 중의 하나가 작가 황석영의 그것이었던 것도 그러고 보면 이상한 일은 아니었을 테다. 전태일이 점화한 70년대 노동운동과 민주화투쟁의 새로운 국면에서 황석영이 「객지」 「한씨 연대기」 「삼포 가는 길」 「돼지꿈」 등 일련의 작품으로 그려내고 포착한 민중 현실의 생생한 모습과 포괄적 인간 진실의 힘은 문학의 울타리를 넘어 저항과 변혁의 은밀한 심지가 되고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렇다면 80년대 초 그 급박한 시절에 그는 어디에 있었는가. 황석영의 자전 『수인』은 내게는 꼭 그 질문에 대한 응답처럼도 보인다.
문학과 예술을 직업으로 삼고 그 기예를 익힌다는 것은 좋은 아버지, 좋은 어머니, 좋은 아들이 되는 일이 아니며, 윤리적인 인간이나 좋은 시민이 되는 일이 아니다. 이것은 토마스 만이 그의 소설 '토니오 크뢰거'에서 그 주인공의 입을 통해 발설했던 말이다. 문학과 예술이 한 시대의 윤리에 지배되는 것도 아니고, 그 윤리를 위해 봉사하는 것도 아니라는 말은 빈말도 헛말도 아니다. 그러나 이 말은 문학과 예술이 비윤리적이어야 한다는 말이 아니며, 윤리적 탈선을 진보적 윤리관으로 포장하는 데에 사용될 수 있는 말도 아니다.
아버지의 국어 경찰 활동은 집안뿐 아니라 대외 순찰로도 이어졌다. 아파트 엘리베이터에 붙은 공고문에서 '반듯이'와 '닥아 내어'에 줄을 긋고 '반드시' '닦아 내어'라고 고쳐놓은 사람은 보나마나 우리 아버지였다. 온 가족이 외식을 하러 갔던 날, 잘 가던 횟집 문 앞에 버티고 선 아버지는 들어갈 생각을 안 했다. 대신 사장님더러 밖으로 좀 나와보라고 불러냈다. 새로 바꾼 발 매트에 적힌 말이 문제였다. "어서 오십시'요'가 아이고요, 어서 오십시'오'가 맞습니더, '오'." 아버지는 피카소가 손전등으로 소를 그리듯 허공에 커다랗게 '오'라고 적어 보였다.
한 달 만에 해외 로케이션 없이 국내에서만 촬영된 이 영화 역시 인물에 주 포커스를 맞춰 배우의 연기력에 온전히 기댄다. 흑백사진 몇 장으로 남아있는 윤동주의 얼굴을 흑백필름으로 그대로 살려내며 실재감을 부여한다. 이준익의 말처럼 '꿩먹고 알먹고'다. 제작비를 대폭 절감한 것은 물론 우리 기억 속 순백의 시인을 자연스럽게 스크린 위로 데려올 수 있었다. '사도'와 '동주'가 같은 시기 시나리오가 작성돼 현재와 과거를 오가는 똑같은 구조를 가지게 됐다는데, 형식뿐만 아니라 기법 면에서도 두 영화는 상당히 닮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