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의 대이동> <더 해빙> <킵고잉>
후보들의 정책실종 사태는 박근혜 후보 부실검증과정이 초래한 악몽을 되살리고 있다. 지난 대선에서 새누리당과 51%의 유권자들은 박근혜 후보에 대한 검증을 제대로 하지 않았다. 일찍이 박근혜-최태민-최순실 관계의 부적절함을 알면서도 미필적 고의로 불량품인 박근혜 후보를 공천하였다. 박근혜-최순실 국정농단사건은 정당의 후보공천과 검증 그리고 유권자의 선택이 잘못되면, '정부실패'와 '정치실패'로, 민주주의가 위기에 빠질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지난 2015년 고용노동부 장관의 '청년 간담회'에 참석한 어느 취업준비생은 "대기업만 고집하지 말고 눈높이를 낮추라는 어른들의 얘기는 '폭력'이나 다름없다"고 했다. 왜 그럴까? 정상근이 쓴 〈나는 이 세상에 없는 청춘이다〉(2011)라는 책에 나오는 다음과 같은 '상식' 때문이다. "야 웃기지 마, 일단 좋은 기업을 들어가야 해. 솔직히 한 달 100만원 주는 직장이랑, 250만원 주는 직장이랑 얼마나 차이가 나는 줄 알아? 시작부터 좋은 데 가지 않으면 넌 평생 그 바닥에서 썩는다. 거기서 빠져나오는 게 얼마나 힘든지 몰라서 그래, 네가."
연대임금제도의 대표적인 예는 최근 소개된 일본판 '동일노동 동일임금제'이다. 일본의 아베 총리가 저성장 고령화 사회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비정규직의 임금을 프랑스·독일·이탈리아 등과 비슷한 정규직의 80% 수준으로 끌어올리기 위해 추진하고 있는 것으로, 아베 총리는 2015년에 '1억 총활약 사회'라는 목표아래 동일노동 동일임금제란 어젠다를 제시한 바 있다. 아베가 추진하고 있는 일본판 동일노동 동일임금제의 기원은 1951년 스웨덴 사민당이 성공적으로 시행하여 세계적으로 소개된 '연대임금제'에 있다.
사디크 칸의 런던 시장 승리를 노동계급의 승리로 읽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의 승리는 흙수저가 아니라 '무슬림'에 더 강력한 방점이 찍혀야 한다. 사디크 칸의 당선이 놀라운 건 신문 배달하던 노동자 청년이 입신양명했기 때문이 아니라, 반이민자 정서와 인종주의가 거센 2016년의 유럽에서 '무슬림'으로서 시장에 당선이 됐기 때문이다. 흙수저의 인간 승리 드라마로 이걸 포장하면, 보수당 정권 아래 있는 지금 영국에서 무슬림 출신 시장을 선택한 런던의 메시지는 흐려진다.
진보 군소 정당들의 20대 후보 절대 다수는 부모인 직계존속의 재산 고지를 거부했다. 지역구 후보 또한 마찬가지였다. 왜 그랬는지 의도는 알 수 있다. '흙수저 당사자'임을 강조하기 위해서였다. 또한 서민과 약자의 정당이라는 이미지를 부각하기 위해서라는 것도 알 수 있다. 그러나 그러한 가치가 민주주의의 투명성의 원칙마저 훼손시켜야 할 이념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아무리 좋은 이념이라도 청렴성이 없으면 그 정책과 가치는 구현될 수 없다. 즉, 사상누각인 셈이다.
요리에 관한 글이든, 예술에 관한 글이든, 정치에 관한 글이든, 후보자는 글을 쓸 수가 없다고 하네요. 날 찍어달라는 것도 아니고, 세상에 대해 얘기를 하고 싶다는데도 글을 쓰지 말라는 것은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민주주의의 가장 기본이 '표현의 자유'라고 하는데, 선거에 나온 후보자는 인터넷 언론에 글을 쓸 자유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헌법재판소에 위헌소송을 제기했습니다. 법률도 아니고 지침(인터넷선거보도심의위원회 훈령)으로 '표현의 자유'를 침해하는 것은 위헌이라는 취지입니다.
오늘날 한국인의 인간관은 여전히 개인으로의 분화를 보여주지 않는다는 점에서 고대사회와 근본적으로 다르지 않다. 한국인들은 인간을 민족이나 씨족 같은 종족 단위 아니면 수저론으로 대표되는 신분계급의 일원으로 파악할 뿐, 개인으로서 이해하지 않는다. 그리하여 일본군 위안부에 대한 인식도 '강제로 끌려간 순결한 민족의 처녀'라는 범주를 벗어나지 못한다. 그녀들은 우리 '민족'이어야 하며 '순결한 처녀'여야 하며 '강제로 끌려가야' 한다.
자수성가형 기업가와 전문가, 성공한 청년 디자이너, 유리천장을 이겨낸 여성과 명사 등 화려한 스펙을 자랑하지만 정작 그들에게서 정당에 입당하기 이전의 삶에서 공동체를 위한 '정치적 견해'를 들어 본 일은 많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분명 개인적 삶에 있어서 노력했고, 성실했으며, 평범하지 않은 성취를 이뤄냈습니다. 하지만 이런 특징을 가진 정치인들은 과거 한국 정치에도 많았다는 사실을 기억해낼 필요가 있습니다. 물론 지금은 '정치권의 때가 묻은 사람'으로 평가되고 있긴 하지만 말입니다.
요즘 유행하는 수저론으로 보면, 대한민국의 기득권 정당은 금수저입니다. '금'이 부모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국민세금으로부터 오는 '금수저'입니다. 최근 안철수 신당이 급하게 이 사람 저 사람 끌어모아 원내교섭단체를 만들려고 하는데, 그것도 국고보조금을 더 많이 받기 위한 것입니다. 금수저를 쪼개 먹겠다는 것입니다.
이명박 정부 때는 탐욕과 범법으로 살아온 장관 후보들이 정부를 책임지겠다고 큰소리치는 것에 역겨워한 사람들이 샌델의 '정의론'에 비상한 관심도 가진 적이 있지만, 박근혜 정권에 들어서 이제는 정의를 말하는 것조차 쓸데없는 일처럼 느끼는 것 같다. 아무리 황당한 일이라도 계속 반복되면, 그것이 통상적인 일이 되어 버리고, 심각한 거짓말도 대형 확성기의 우격다짐의 방식으로 반복적으로 유포되면, 그것이 거짓말이라는 것을 알아도 사람들은 반박할 의욕을 상실해 버린다. 며칠 전의 세월호 청문회처럼 모든 언론이 완벽하게 외면하여 지금 세상에서 벌어지는 그 어떤 중요하고 심각한 일도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으면, 이제는 고발하고 폭로하는 사람이 바보가 된다.
건국 1백년도 채 안 된 사이 우리 기득권의 가치관과 행태는 천년 제국 로마의 후기를 닮아가고 있다. 이제 우리 사회에서는 로마 공화정 당시 '개천에서 난 용' 격인 마리우스의 탄생을 기대할 수조차 없다. 그렇다고 근현대 영국 상류층에 필적할 노블리스 오블리제 개념은 더더욱 없다. 자신의 자녀들을 전쟁의 일선은 고사하고 군대에 보낼 마음조차 없다. 그런 상황에서 그저 민주주의의 퇴행이나 천민자본주의 단계의 시장 경제에 자족하며 마음 속으로 외칠 뿐이다. '이대로 영원히!'
좋은 교육의 기회조차 상위 계층이 독점하다시피 하고 있다. 더욱이 상위 계층이 아닌 이상 좋은 교육조차 예전처럼 계층 이동의 확실한 수단은 아니라는 증거가 분명해지고 있다. 부모 세대인 산업화 세대가 쌓아놓은 계층의 벽이 계급이라는 성(城)처럼 확고해져서, 개인으로서는 이를 넘어서거나 부술 수가 없게 된 것이다. 당장의 고통보다 더욱 견딜 수 없는 것은, 그것에서 쉽게 벗어날 수 없다는 좌절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