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스러운 아름다움을 품은 배경에 현대적인 가치를 담은 사극을 응원한다.
한국의 14번째 세계유산이 됐다.
6월30일 세계유산위에서 최종 결정된다.
차례상을 차린다면 "과일과 송편으로도 충분하다"고 한다.
17세기 무렵 조선 땅은 비참했다. 임금은 항복했지만 시련은 끝나지 않았다. 1627년 정묘호란, 1636년 병자호란 모두가 그럴듯한 명분으로 시작되었고 그럴듯한 명분과 실리로 전쟁이 끝이 났다. 그러나 시작과 끝 사이에서 그리고 끝 이후에서 많은 이들의 '삶'은 철저하게 파괴되었다. 특히나 힘없는 민중들의 삶이 그러했다.
기업 하는 사람이 경제를 안다는 것은 결국 말이 안 되는 얘기다. 이명박이 경제를 안다? 지나고 보니 우스꽝스러운 얘기였다. 기업을 아는 것이지 경제를 아는 것이 아니다. 기업과 경제를 동일시하는 것은 지극히 초보적인 생각이다. 기업가 출신들은 친기업 정책을 쓰지 친국민 정책을 쓰지 않는다. 다시 말하지만 정책을 전환하면 거기에 맞는 사람을 써야 한다. 안 맞는 사람에게 그렇게 해보라고 하면 결코 그렇게 되지 않는다. 이것이 이명박 정부의 경제 정책이 실패한 가장 큰 원인 중 하나이다.
훈민정음의 창제와 반포 과정에서 개인적으로 가장 압도된 것은 이 세종이란 사내가 1443년에 훈민정음을 완성해 놓고선 바로 일반 백성에게 반포하지 않고 3년(!) 동안 기다리며 말하자면 테스트를 해보고 쓸 만하다는 자신이 생긴 다음인 1446년에야 반포한 점이다. 뭐랄까 당시 조선의 땅 한자락에 대한 처분권, 백성 한 명에 대한 생사여탈권을 당신 세종대왕님께서 모두 쥐고 있다는 도저한 절대군주로서의 자신감이 없으면 감행할 수 없는 일종의 사치이면서도 또한 그러한 절대권력자가 빠지기 쉬운 자만과 조급함의 유혹을 대단한 자제력으로 극복한 게 이 '훈민정음 창제 3년 후 반포'라는 기막힌 기다림이 아닐까 싶다.
여기가 어딜 것이라 생각하는가? 잘 보면 한국 사람들은 보이지 않고 외국인들만 그득하니 한국은 아닌 듯싶다. 그렇다. 이곳은 한국이 아닌 저 북구의 나라, 스웨덴이다. 나는 여기에서 시민정신의 한계를 보았다. 세계 최고의 시민정신으로 무장된 사람들이라도 흥겹게 노는 상황에서 마냥 쓰레기를 들고 다닐 수는 없는 일이었다. 쓰레기통이 보이지 않자 그들도 누구나 할 것 없이 아무 곳이나 버렸고 공원 전체는 쓰레기장이 된 것이다.
남북한의 역사인식은 시대 구분, 특히 근현대 시대 구분론에서 차이가 있을지라도 내용적으로는 단일한 혈연·언어·문화를 강조하는 민족주의 담론 위에 서 있다. 민족주의에 대한 학계 내외의 비판에도 불구하고 남한의 역사교과서는 역사 서술의 주인공을 단일 혈통의 민족으로 두고 있다. 역사교과서 첫 장의 제목은 '우리 역사의 형성과 고대 국가의 발전'이며, 학습 목표 1번은 '우리 민족의 기원을 파악'하자는 것이다. 북한 역사학계는 민족이 부르주아 사회 형성기에 만들어진다는 유물사관의 기본논리와 달리, 민족의 원초성을 강조하며, '자기 민족 제일주의'를 제창했다.
여말선초의 당대인들에게는, 특히 그와 최후의 담판을 한 이방원이나, 친구 정도전, 정몽주를 참모로 데리고 다니며 전장을 같이 누볐던 이성계 모두 "아니 이 친구 이제 와서 왜 이래. 같은 선수끼리 이래도 되는 거야?"하는 이런 생각이 들지 않았을까 싶은 느낌적 느낌. 왜냐하면 이성계의 조선 왕조 창건에 가장 결정적 역할을 하였던 위화도회군 후에 우왕 및 창왕을 신돈의 씨라고 해서ㄷㄷㄷ 퇴위시킬 때 정몽주는 여기에 찬동한 주요 대신들 중 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이방원, 정도전, 이성계 이런 사람들한테는 정몽주는 자기들이랑 같이 역성혁명(易姓革命)하는 길을 다 같이 닦아 놓고서는 막상 이성계가 마지막 작전으로 왕위에 오르려고 하니까 획 돌변해서 갑자기 고려왕조의 수호천사가 되겠다고 뜬금없이 나선 셈인 것임.
홍봉한은 정작 사도세자가 죄인으로 죽고나서 그 아들인 세손 정조의 왕위계승도 위태로워졌을 때 외손자인 세손을 구출하기 위해서 나선 걸 보면 괜시리 홍봉한에 대한 변명을 하고 싶어지는 것이다;; 딸을 과부로 만들고 외손자가 아비 없이 커야 하는 기막힌 상황이었다ㅠㅠ 과부조차도 개가(改嫁)를 못하는 성리학 탈레반 사대부가 지배계급인 조선시대였고 그게 아니더라도 세자빈이 세자 사후 개가라니 상상도 못할 일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사위를 구하려고 나섰다간 집안이 망했을 거고 그 잘난 사위 따라다니다가 소속 당파가 폭싹 망할 지경이었으니;; 홍봉한 이 양반 눈물을 머금고 사위를 버리고 딸하고 외손자랑 집안을 구하는 대규모 사석(捨石) 작전을 쓴 게 아닐까?
최근 들어 개인 간 거래는 널리 퍼져 가장 가난한 계층부터 노동당과 군 간부들에게까지 사회 곳곳에 스며들었다. 하지만 영국의 빅토리아 시대에 성(性)이 그러했듯, 북한의 자본주의에는 이중 잣대가 존재한다. '누구나 하지만, 그 누구도 그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다' 1990년대 중반의 대기근은 전환점이 되었다. 정부가 제공하는 일상적인 식량배급은 대기근 시기 거의 사라졌고 이후에도 완전히 회복되지 않았다. 살아남은 사람들이 이 경험을 통해 체득한 것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자본주의적 방식을 통한 각자도생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