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로잉은 작가적 신뢰와 진정성을 가늠할 때 외부인이 의존하는 잣대가 되기도 한다. 한 작가가 쌓아올린 드로잉 선집은 완성도 여부를 떠나 작가적 신뢰에 대한 증거처럼 믿어진다. 내가 주목한 건 그가 쌓아온 드로잉의 분량이 아니라 제작일을 기록하고 과거사를 보관하는 태도였다. 이쯤 되자, '흠. 역시 그랬구나.'하는 생각에 이르렀다. 기록편집증. 전적으로 제3자를 염두에 두지 않고 자신을 위해 써나간 기록일 텐데, 그럼에도 언젠가 공개를 염두에 둘 수밖에 없는 성격의 자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