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청난 행운.
동물의 존엄성을 법적으로 인정해줘야 한다는 이야기도 했다.
"덕분에 전세계 어린이가 과학을 쉽게 이해할 수 있었다"
성악설 vs 성선설
광렬 씨는 영원해
훌륭한 고대 책자도 현시대를 반영할 수 있어야 하므로
역시 핵심은 질 삽입이 아니라 '클리토리스'다.
다 읽고 방치한 책들은 꽉 찬 책장에 자리 잡지 못하고 바닥과 책상, 침대에 켜켜이 쌓여 사나운 기둥이 된다. 그래도 나는 책을 계속 사들이고 있다. 흥미로운 책이 출간되었다는 소식을 들으면 괴로워서 뒹굴거리다 유혹에 항복한다. 고뇌와 지름의 과정을 관찰하여 결론 내건대, 나는 독서가가 아닌 귀 얇은 소비자에 가깝다. 책들과 통장을 학대하고 있다. 죄책감으로 심란한 마음을 달랜답시고 정리정돈 기술에 관한 책을 사서 책 기둥의 키만 키우는 어리석음이라니.
역사는 파괴와 새로운 창조가 아니라 연속적인 발전 과정이다. 치욕스런 일제 조선의 역사도 엄연한 한국인의 역사다. 김윤식은 '전천후 세대' 비평가다. 1936년생인 그는 자신 세대의 포로가 아니다. "나 자신의 세대 의식은 없다" 스스로 고백하듯이 특정세대이기를 거부하고 객관적 투명성을 미덕으로 삼은 '구경꾼' 내지는 '방관자'의 특권을 극대로 행사한다.
작은 바늘이 뚫은 살갗에 잉크가 스며 만들어진 그림. 그것이 자리 잡고 완전히 아물기까지의 과정은 마음의 상처가 치유되는 과정과도 닮았다. 아름다운 추억은 기쁨의 삽화가 되기도 하고, 미숙한 결정, 충동들은 어둠의 기록으로 남기도 한다. 어느 쪽이든 그 안에는 이야기와 이미지가 들어 있다. 자랑하고 싶은 것이든 숨기고 싶은 것이든. 적어도 내가 생각하는 타투와 과거는 그런 것이다.
만화책 등장 이전에 20세기 초반 미국 소년들은 값싼 갱지로 만들어진 소설 모음집인 '펄프 매거진'을, 그 이전에는 '다임 노블', '스토리 페이퍼' 등을 즐겨 읽었다. 형식은 약간씩 달라도 우리식으로는 '소설 잡지' 정도로 보면 될 듯한데, 이 중에 배트맨의 원조로 꼽히는 것이 하나 있다. 바로 1882년 12월 16일자 《뉴욕의 소년들(The Boys of New York)》 383호에 수록된 '검은 옷의 사나이(Man in Black)'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