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전문가들 사이에서도 다툼이 있는 숫자"
정우성을 비롯해 한지민·고성희·윤계상·이하늬·온주완 등이 나섰다.
시민대중의 일상생활이 평안하고 안락하도록 하는 것은 정치와 사회시스템의 기본목표에 속한다. 시민대중으로 하여금 한겨울에 주말마다 광장으로 나와 추위와 불편을 감내하며 촛불을 밝히고 토론을 펼치자고 하는 것은 주객전도 내지 가치계서 도착倒錯의 태도가 아닐 수 없다. 정치개혁은 시민생활의 안정을 위한 수단-방법이지 목표가 아니다. 시민대중의 지혜와 노력을 자신(들)의 정치적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도구로 동원하려는 태도는 비겁한 일이다. 포퓰리즘을 넘어 벌가리즘에 해당한다 하겠다.
자본중심 사회의 돌연변이 악마가 출연했다 여겼던 그 때의 충격이 근래 다시 되살아나는 듯하다. 이번에는 개인이나 작은 그룹정도의 단위가 아닌 국가단위라는 것이 더 끔찍해진 스케일을 자랑한다. 위안부 할머니들에 대한 10억엔 출연! 이것이 빌리브란트가 유대인 위령비 앞에서 무릎 꿇은 것과 비견되기라도 하는듯 언론은 앞다투어 보도를 한다.
왜 이렇게 광복절을 폄하하는 것일까? 그의 글을 보니 뉴라이트들이 줄기차게 얘기해온 대목과 일치하는 게 있다. '대한민국 건국'이라 하지 않고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이라고 쓰면서 '해방'과 '광복'만을 강조하는 역사관이 마음에 들지 않는 거다. 뉴라이트들이 진저리나게 싫어하는 이 역사관은 때론 '수정주의 좌파'로, 때론 고루한 '민족주의 우파'로 그때그때 달리 낙인된다. 고무줄 같은 그 기준이 참으로 놀라울 따름이다.
만약 나라가 1948년 8월 15일에 세워진 것이라고 한다면 친일반민족행위자들의 친일반민족행위는 비난 가능성이 한결 줄어든다. 존재한 적도 없는 나라의 재건을 위해 헌신하고 희생하는 걸 기대하기란 어렵기 때문이다. 충성을 바칠 대상이 없는 사람들이 일제를 위해 부역했다 한들 그게 그리 큰 흠도 아니다. 거기에서 멈추는 것이 아니다. 1948년 8월 15일이 건국절이 되면 친일반민족행위자들은 건국의 아버지들이 된다. 그들이 대한민국의 거의 전 부면을 장악했고 조직했기 때문이다.
1948년 헌법을 무어라고 부르는가? 요즘은 '제헌헌법'이라고 많이 지칭하는 것 같다. 그런데 1980-90년대에는 '건국헌법'이라는 호칭이 더 많이 쓰였다. 그것은 당시의 제일 유명했던 두 분의 헌법학자, 김철수교수와 권영성교수의 헌법학 책에서 서로 다르게 쓰였기 때문이다. 김교수는 '제헌헌법'이라 했는데, 권교수의 경우에는 제헌헌법의 어법을 문제 삼았다. 다시 말해 '헌법을 제정하는 헌법'이라는 '제헌헌법'의 용례가 잘못되었음을 지적하고, '건국헌법'이라는 명칭을 사용했다. 그래서 많은 법학도와 수험생들이 약 20년 동안 '건국헌법'이라는 용어에 익숙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