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 상황을 고려해 유가족과 정치권 인사들만이 참석했다.
방역 문제와 기관장 형식 장례를 반대하는 각계의 목소리를 의식한 것으로 보인다.
"아니 ㅋㅋㅋ 이제 김정은한테까지 손가락하트를 시키다니 ㅋㅋㅋ"
명단이 발표됐다
새해가 밝았다. 그런데 새해가 정말 새로운 시작이 될 수 있을까. 국내정세는 지난해의 연장선이 될 것이라고 보는 사람이 많은 것 같다. 6월 지방선거까지는 '적폐청산'의 기조가 이어질 것이고 이것이 정국의 기본구도가 될 것이라고들 한다.
'촛불'은 혁명 맞다. 하지만 생각 없이 혁명을 말하며 기분 내는 것은 촛불혁명의 성공에 도움이 안 될 것이다. 사실 우리가 자랑하는 촛불항쟁의 평화로운 성격은 고전적 혁명론에 어긋나는 특성이며, 대통령 파면과 정권교체가 기존 헌정질서의 규칙에 따라 이루어졌기 때문에 '촛불'이 87년체제의 수호요 재작동이지 혁명일 수 없다는 주장도 학자들로부터 제기된 바 있다.
촛불로 평화의 공간을 연 지 1년이 지난 오늘, 우리의 삶은 얼마나 더 평화로워졌는가? 한반도는, 동북아는 평화를 구가하고 있는가? 오히려 지금 동북아에서는 국가 폭력과 위협이 태풍처럼 횡행하고 있다. 그 태풍의 핵은 한반도이다. 그리고 그 핵을 지배하는 힘은 국가주의다.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을 할지가 막막한 때일수록 하지 말아야 할 것을 안 하는 일이다. 특히 낡은 언어를 극구 피해갈 줄 알아야 한다. '독자적 핵무장'이니 '전술핵 재배치'뿐 아니라 '북을 대화로 끌어내는 더욱 강력한 제재와 압박'도 낡아빠진 언어이기는 마찬가지다. 물론 '통일만이 살길이다'는 익숙한 옛 노래를 다시 불러도 곤란하다. 그렇다고 '이제 통일은 잊어버리고 남북이 이웃나라로 평화롭게 살자'는 주장도 새로울 것 없는 공리공론이다. 이 땅은 무작정 통일을 부르짖는다고 통일이 되고 평화가 오는 곳도 아니려니와, 점진적·단계적 과정으로서의 통일마저 외면한 채 두 나라의 항구적 평화공존을 주장한다고 평화가 달성되는 지역도 아니기 때문이다.
최근 인사청문회에서 일부 정당들이 보여준 모습이야말로 시민 없는 대의제의 문제점을 여실히 보여준다. 문재인정부의 인사 과정에서 시민의 참여가 원천 배제되고 있는 것도 촛불 거버넌스와는 거리가 있다. 더구나 청문회 제도의 개선책에서도 시민의 역할이 논의되지 않고 있는 것은 놀랄 만한 일이다. 문재인정부에 시민사회 출신 인사들이 참여하는 것이 '시민사회와의 협치'라고 비꼬는 것도 온당치 않다. 과거 보수정부도 민주정부도 시민사회에서 새로운 인물을 '수혈'받았고, 그러한 수혈의 한계도 여실히 보여준 바 있기 때문이다. 촛불혁명이 요구하는 것은 수혈이 아니라 수술이다.
혁명의 일차적 성공이 혹시라도 4·19 이후와 같은 변질로 귀결되지 않을까, 또는 87년체제의 단순한 변형에 그치지 않을까 하는 걱정은 어느 자리에서 하든 긴요하다. 그런 점에서 '광장'과 '일상'은 겉으로 보이는 것과 달리 깊이 내적으로 연결되어 있고 그렇게 연결되어 있음을 상시적으로 자각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주말마다 집회에 참석하는 것은 주중의 힘든 일상을 개혁하기 위해서이고, 주중의 압박 속에서도 삶을 이어가는 것은 주말의 행동을 통해 내일을 기약할 수 있다는 희망 때문 아닌가.
박근혜정권의 블랙리스트는 과거 독재정권의 검열과는 달리 신체적 위해를 가하지 않는 반면 철저하게 제도적 불이익을 준다. 열악한 조건에서 창작하는 문화예술인에게 정부 지원을 끊고 외부 지원을 차단하는 저급한 검열방식인 것이다. 블랙리스트의 명분을 여전히 종북·좌파세력에 대한 대응에서 찾고 있으나 실제와는 너무 큰 괴리가 있다는 것도 눈에 띈다. 언론에 공개된 9473명의 블랙리스트 명단은 세월호사건의 진상규명을 요구하거나 선거에서 문재인과 박원순을 지지한 사람들로 알려졌는데, 이들 모두를 종북·좌파로 규정하는 것은 우스꽝스러울 따름이다.
중요한 것은 누가 누구를 지지하느냐 마느냐가 아니라 정치권이 자기네 후보를 결정하는 방식 자체가 촛불 이전과는 달라져야 한다는 원칙입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시민들의 거대한 노력과 희생으로 대통령을 축출하고 정치판 전체를 흔들어놓았는데 유독 정당들만은 87년체제가 만들어낸 틀 그대로 당내 경선을 치르고 그렇게 탄생한 서너명의 유력후보 중 하나를 옛날식 그대로, 마음에 드는 사람이 없으면 제일 덜 싫은 후보라도 찍으라고 들이미는 것은 심지어 상도의(商道義)에도 어긋나는 일 아니겠습니까.
처음 두번은 시위에 놀란 박근혜씨가 진정성이 결여된 사과나마 연거푸 했다. 하지만 국민들이 전혀 넘어가지 않고 11월 12일의 3차 촛불대행진을 통해 퇴진판결을 (말하자면 3심에서) 확정하자, 도리어 정면 불복의 길을 택했다. 주권자에 맞선 '내란' 수준의 저항으로 가기 시작한 것이다. 19일의 4차 집회는 따라서 종전의 국정농단·부정비리에 대한 단죄에서 '내란진압' 작업으로 옮겨갔다고 말할 수 있다. 26일의 집회가 구체적으로 어떤 모습을 띠건 간에 실질적 '내란죄'에 대한 국민적 소추(訴追)를 확인할 것만은 분명하다. 그리고 이후의 응징작업은 집회인원이 불고 줄고를 떠나 더욱 다양하고 창의적으로, 즐겁고 질기게 진행될 것이다.
지금 우리는 최순실이 옆에 없는 대통령에게 누가 그 역할을 하는지 계속해서 묻고 있다.
역사는 파괴와 새로운 창조가 아니라 연속적인 발전 과정이다. 치욕스런 일제 조선의 역사도 엄연한 한국인의 역사다. 김윤식은 '전천후 세대' 비평가다. 1936년생인 그는 자신 세대의 포로가 아니다. "나 자신의 세대 의식은 없다" 스스로 고백하듯이 특정세대이기를 거부하고 객관적 투명성을 미덕으로 삼은 '구경꾼' 내지는 '방관자'의 특권을 극대로 행사한다.
2007년 대선에서 결정적으로 패한 이후 선거마다 거의 연전연패하면서 야당은 재집권 노력보다 원내 제2당의 알량한 기득권에 안주하는 습성이 생겼습니다. 87년체제 말기국면 특유의 이런 현상이 곧 한국판 양당 기득권구조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수구세력은 제1야당에 나눠주는 먹이조차 점점 더 아까워지고 선거 때마다 표를 얻어야 하는 일이 너무 부담스럽기 때문에 아예 87년체제를 자기들 식으로 끝내려는 작업을 속속 진행하고 있는 것입니다.
두 야당이 자랑스럽게 영입한 인사들은 대부분 신자유주의의 추종자들과 승자들이다. 승자독식 경제의 희생자들과 패배자들, 신자유주의 비판자들은 야당에서조차 찬밥 신세다. 야당에서마저 '안보수구'와 '경제보수'가 개혁의 선봉장으로 대접받고 '새 피'로 환영받는 전도된 정치환경 속에서 세계에서 유례가 없는 우편향 정치구조가 더욱 우경화되어가고 있다.
대선에서 누가 이기든 박근혜 대통령 자신의 임기연장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87년 6월항쟁의 최대 열매 가운데 하나인 선거를 통한 정권교체의 가능성은 최근 몇년간 착실히 축소되어왔다. 2012년 선거에서의 대대적인 관권개입과 불법행위에 대한 조사와 처벌이 대부분 흐지부지되었고, 수사기관의 독립성, 관료조직의 중립성, 언론의 공정성 등 재발방지 장치들이 하나같이 멸종위기에 놓였다. 시민들이 집회와 시위를 통해 의사를 직접 표시할 기회는 극도로 억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