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요한 건 결과보다 대화 자체다.
이국종-김종대 논란을 뒤늦게 보면서 기시감이 든다. 이교수는 그저 환자를 '집도' 대상으로서 건조하게 마주하고(그러나 그 신체에는 최대한의 성실성으로 마주하면서), 그렇게 신체가 하나의 신체일 수 밖에 없었던 시간에 본 일을 말했을 뿐이다. 그러니 그 때 파악된 언급된 기생충이니 분변이니 역시 신체에 부수된 건조한(신체적 의미만 갖는) 대상일 뿐이다.
이 판결의 가장 큰 문제점은 검사가 제출한 왜곡된 책 요약(악의적인 독해)을 그대로 차용해 사용했다는 점이다. 아래에 인용해 두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나의 책의 취지를 충분히 살펴 요약하면서도, 결국은 내가 가장 신경을 써서 독자의 오해가 없도록 쓴 부분에 관해 재판부는 검사가 멋대로 왜곡한 요약을 가져와 내가 한 말처럼 왜곡했다.
위안부의 아이돌화라는 말로 내가 우려했던 건 위안부를 생각하는 마음이 아니다. 오히려 그 앞에 서면 설수록 다른 한편으로 진짜 위안부와 멀어지게 만들 수 있음을 나는 나는 우려했다. 달리 말하면 너무나 가볍게 소비하면서, 아무도 그 안의 진실을 제대로 보려고는 하지 않는.
한번쯤은 일본과 대적해 보고 싶었던 조선남성의 욕망을 구체화한 영화. 220억이나 들였다는 영화 〈군함도〉를 이렇게 밖에 말할 수밖에 없다는 건 슬픈 일일 뿐 아니라 거의 재앙이다. 군함도엔 과거 인간들이 행한 일에 대한 아픔, 그래서 일본인조차 감동시킬 수 있는 호소력이 없다. 그리고 그저 과거의 아픔을 성찰 없이 곧바로 오늘의 긍지로 치환시킨 21세기 대한민국의 대리만족만 있다. 제작자와 출연자의 의도와 상관없이. 그곳에선 "피해자"란 오로지 관념일 뿐이고, 그렇게 형해화된 "피해자"는 쉽게 소비될 수밖에 없다.
어쩌면, 몰래 혼인신고를 하는 식의 "낭만주의적 남성성"이, 상대뿐 아니라 자신도 불행하게 만들었다는 뼈저린 회오가 이 책을 쓰게 만든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이 책은 "기존 남성들의 사고 방식"을 비판하고 있다. 그리고 그런 기조 위에서 차세대 남성들에게 다른 길을 걷기를 권한다. 그렇게 이 책은 "젠더화"된 개체들의 불안과 불행에 대해 말하고 있는 책이고, 문재인 대통령이나 박원순 시장과 달리 동성애자 등 소수자에 대한 사회적 편견도 명확히 지적한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그 판매자가 팔겠다고 내놓은 책이 너무 갖고 싶었는데 차마 구매하겠다는 댓글을 달지 못하고 전전긍긍하다가 결국 꼼수를 생각해냈다. 판매자가 알지 못하는 다른 이메일 계정을 이용해서 책을 사겠다는 메일을 보낸 것이다. 판매자에게 금세 답장이 왔다. 그 책을 나에게 팔겠단다. 그런데 그다음 말이 나를 기겁하게 했다. 팔긴 팔겠는데 혹시 저번에 본인이랑 댓글로 대판 싸운 '박 선생'이 아니냐고 물어왔다. 그뿐만 아니라 "저번에 나랑 싸운 뒤라 민망해서 다른 이메일 계정으로 연락한 것이 아니냐"라는 정확한 추측까지 덧붙였다. 나는 즉시 답장했다. "그때 그 사람이 누군지 나는 모르겠다. 난 당신과 처음 거래한다"라고 말이다.
'돈을 받았으니 끝났다'는 생각은 아직 하지 못한 일에 대한 물음이 없고, '돈 따위로 해결하려 하지 말라'는 생각에는 어렵게 합의를 이루어낸 '외교'에 대한 존중이 없다. 무엇보다 '책임이란 무엇으로 지울 수 있는지'에 대한 근원적 물음이 없다. 소녀상을 지키려는 이들은 소녀상이 '아픔'을 상징한다고 말한다. 분명 소녀상 자체는 그렇게도 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다른 곳 아닌 영사관이나 대사관 앞에 서 있는 소녀상은 분명 '저항과 항의'를 표상한다. 소녀든 항의 정신이든 '지키는' 일은 숭고하다. 하지만 사고정지 상태로 지키거나 반대하는 일은, 결국 누구의 자존심도 지키지 못한다.
형사소송에서 승소했지만, 저의 명예회복은 여전히 요원해 보이는군요. 아니, 오히려 법원이 말한 "틀린 표현도 보호할 수 있다"는 말을 대부분 언론이 앞뒤 맥락 없이 인용한 탓에 오히려 법원이 나의 의견을 "틀린 의견"으로 간주하면서도 "학문의 자유"라는 이름으로 보호한 것처럼 인식한 이들이 더 많아졌을 것 같기도 합니다. 가처분 소송과 손해배상 소송에서 제가 진 이유를, 저는 명확하게 압니다. 달리 말하자면 형사소송에서 이긴 이유를 명확하게 압니다.
지식인들이 이 문제가 사법처리로 가지 않도록 예방하기 위해, 다양한 각도와 시각에서 진지하고 용기있게 대응하려고 얼마나 노력했는지 궁금하다. 필자가 지식인들이 얼마나 노력했는가에 대한 질문을 던졌을 때, 주변인들은 박유하 교수의 책을 읽으면서도 평을 하는 것을 금기시하는 무시전략을 폈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이런 점을 볼 때, 지식인들의 학문적 공론장 역할은 거의 하지를 못했고, 따라서 이번 사태가 사법처리로 이어진 데에는 지식인들의 책임방기가 있었고 이것은 지식인의 자성이 필요한 대목이다.
제가 〈제국의 위안부〉를 통해 시도한 일은 오로지 자신의 체험을 드러내놓고 말하지 못하고, 말했으나 잊혔던 목소리를 그저 복원하고, 세상사람들이 들을 수 있는 공간으로 내보내는 일이었습니다. 물론 그런 목소리만이 진짜 진실이라고 말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위안부할머니들을 둘러싼 일임에도 위안부문제가 당사자의 일부를 점점 제쳐놓고 진행되는 것을 보면서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침묵하게 된 분들의 목소리도 일단 들어야 한다는 것이 저의 생각이었습니다. 그리고 당사자들 간의 생각이 다르다면, 주변 사람들도 함께 다시 생각해 보자, 오로지 그것뿐이었습니다.
우리가 맞서고 있는 상대는, 지배와 억압이 아니라 간접적인 피해, 눈에 보이는 폭력이 아니라 보이지 않았던 거짓과 잘못 사용된 권력이다. 군사정권의 폭압이 아니라, 부드러워 보였던 공주의 무능에 대한 분노다. 그렇다면 당연히 시위 양상도 달라야 하지 않을까. 분노는 꼭 폭력으로만 표출할 수 있는 건 아니다. 박근혜가 두려워 하는 건 힘이 아니라 숫자일 터. 여성, 아이, 혹은 장애를 가진, 힘에서 밀리는 이들이 함께 할 수 있는 시위가 되었으면 좋겠다. 그래야 "30년 후의 시위"다워지지 않을까. 가진 힘을 쓰지 않는 영웅들이 있는 데모.
나의 책이 허위가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협력이나 자발성 자체를 강조해야 했기에 이번 공판은 특별히 마음이 무거운 자리였다. 나의 책은 그런 것을 강조하는 일 자체에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법정에서의 공방이란 책의 취지를 협애한 것으로 만드는 행위였다. 물론 그것은 내가 시작한 사태는 아니다.
이 책은 위안부가 아니라 지원단체를 비판한 책이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고발된 이유다. 실제로 100곳 이상 지적된 곳 중 반 가까이가 정대협을 비판한 부분이다. 실제로, 가처분 재판에서 지적된 곳 중 3분의 1만 받아들여졌다는 것도 그 사실을 말해준다. 그들은 자신들의 해결방식을 20년 이상 주장해왔고 다른 방식도 있지 않을까라고 문제제기한 책을 고발한 것이다.
모든 학문은 사실 늘 가설일 뿐이다. 나의 책은 과거 20년 이상 한국사회에서 정착된 '상식'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는 책이다. 따라서 나의 생각은 어디까지나 현재 시점에서 생각한 '나의 진실'일 뿐이다. 공감해 주는 이들이 있을 경우 그 진실 공간이 넓어질 뿐. 검찰은 '가설'로서의 학술서에 대해 '사실'을 적시했다는 전제를 들이대고 있는 셈이다. 그러면서도 '자신들이 설정한 사실'과 다른 '사실'을 내가 말했다고 주장하고 있는 셈이다. 이 역시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근본적인 모순, 근본적인 뒤틀림. 학술서를 둘러싼 법정이란 그런 공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