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이 멋스런 고집불통 사내가 정말로 고맙다. 정교한 만듦새와 아름다운 디자인에 기꺼이 가치를 지불하는 사람이었던 게 고맙다. 아름다운 우리 것을 잘 알아보고 그것을 가장 세련된 방식으로 전하려 했던 그 태도가 고맙다. "때론 돈을 낙엽처럼 불태울 줄도 알아야 한다."던 그가 모아놓은 6500점의 유물이 고맙다. 그가 쓴 맛깔나는 문장들이 고맙고, 그가 남긴 잡지들이 고맙고, 그가 세상에 둘도 없는 멋쟁이였던 게 고맙다. 나는 한 번도 만나본 적 없는 이 남자가 〈뿌리깊은 나무〉 출판사의 집무실에 앉아 있는 모습을 떠올려 볼 때가 있다. 시간을 머금은 보드라운 질감의 토기를 들고 찬찬히 들여다 보다 한두 번쯤 쓰다듬는 그의 손길을. 손목엔 파텍 필립을 차고 말이다.
구멍가게는 조만간 사라질 것이며 십 년쯤 뒤에는 〈동전 하나로도 행복했던 구멍가게의 날들〉에 수록된 그림으로 만나게 되겠지. 나로서는 구멍가게보다는 '점빵(점방이라는 표준말을 쓰기 싫다)'이라는 이름이 익숙하다. 구멍가게라는 말은 어른이 되고 대학교육을 받고, 도시 생활을 하면서 쓰게 된 말에 지나지 않는다. 코흘리개 시절 내가 살던 시골 마을은 살 만한 곳이었다. 버스마저 들어오지 않는 산골 마을이었지만 점빵과 이발소, 심지어 '고약'을 직접 만들어 파는 할아버지도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그 판매자가 팔겠다고 내놓은 책이 너무 갖고 싶었는데 차마 구매하겠다는 댓글을 달지 못하고 전전긍긍하다가 결국 꼼수를 생각해냈다. 판매자가 알지 못하는 다른 이메일 계정을 이용해서 책을 사겠다는 메일을 보낸 것이다. 판매자에게 금세 답장이 왔다. 그 책을 나에게 팔겠단다. 그런데 그다음 말이 나를 기겁하게 했다. 팔긴 팔겠는데 혹시 저번에 본인이랑 댓글로 대판 싸운 '박 선생'이 아니냐고 물어왔다. 그뿐만 아니라 "저번에 나랑 싸운 뒤라 민망해서 다른 이메일 계정으로 연락한 것이 아니냐"라는 정확한 추측까지 덧붙였다. 나는 즉시 답장했다. "그때 그 사람이 누군지 나는 모르겠다. 난 당신과 처음 거래한다"라고 말이다.
책은 자신만의 공간을 가지고 싶은 은둔자에게 좋은 방어벽으로도 사용될 수 있다. 직장의 사무실에서 고개만 들면 직장상사와 눈이 마주치는 최악의 입지를 가진 사람에게 권한다. 책상 위에 책장이나 선반이 있다면 좋겠다. 고개를 들어도 상사와 눈이 마주치지 않는 높이로 책을 쌓아두면 여러 가지 이득이 생긴다. 책의 장르도 중요하다. 제목만 봐도 책의 내용을 누구라도 짐작할 수 있는 고전이 좋겠다. 그래야 무슨 책이냐며 당신의 자리에 일부러 다가와 책을 펼쳐서 당신의 평화를 방해하지 않고 당신이 매우 지적인 사람이라는 이미지를 줄 수 있기 때문이다.
책과 육체적 사랑을 나누는 애서가와 정신적 사랑을 나누는 부류가 그들이다. 육체적 사랑을 나누는 애서가는 책을 함부로 다룬다. 밑줄을 긋고 메모를 하고 심지어는 침을 묻혀가면서 읽는다. 또 읽다가 멈출 때는 스스럼없이 다음에 읽어야 할 부분을 접는다. 정신적 사랑을 나누는 애서가는 책을 마치 보물처럼 다룬다. 조심스럽게 책장을 넘기고 반드시 책갈피를 사용하며 심지어 책 표지의 띠지조차도 소중히 여겨서 절대로 버리지 않는다.
절대 다수의 장서가는 공간에 대한 한계 때문에 어느 순간부터 책을 사는 일이 두렵고 새로운 좋은 책을 발견하는 일이 불편하게 될 수도 있다. 책을 사다 둘 곳이 없으며 억지로 구겨 넣는다고 해도 제때에 제대로 활용하기가 힘들다. 심지어는 그 책을 자신이 소장하고 있다는 사실을 까마득히 잊고 지내기도 한다. 누가 강유원의 '책과 세계'를 강력추천해서 장바구니에 넣어두었다. 드디어 주문했고 배송이 시작되었다. 그 무렵 책이 넘쳐서 정리되지 않은 책장을 뒤척거리다가 '책과 세계'를 발견했다.
진돗개가 그렇듯 장서는 한 주인만을 섬긴다. 주인을 잃은 장서는 안타깝지만, 애물단지에 지나지 않는다. 마치 주인이 세상을 떠나며 버림받은 유기견의 신세와 비슷하다. 장서를 의도치 않게 떠안은 자식들은 대개 헌책방이나 고물상에 무게를 달아 팔아넘긴다. 이런 이유로 헌책이나 희귀본 수집가들에게 최고의 기회는 다른 교양 있는 장서가의 죽음이다. 내 서재의 문제로 넘어가 보자. 내가 두 눈을 시퍼렇게 뜨고 있는 지금도 내 서재의 장서는 풍전등화 신세다.
사진가 남편은 아내가 유방암에 걸렸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충격을 받은 남편은 아내를 위해서 뭘 해줄 수 있을까 고민을 하다가 '웃음이 최고의 명약'이라는 명언을 떠올린다. 전형적인 중년의 몸매를 가진 남편은 아내를 위해서 기꺼이 오직 튀튀만 입고 재미있는 사진을 찍어서 아내에게 선물하기로 한다.
'변경의 역사'의 주인공이 돈대이긴 하나 그의 사진의 피사체는 돈대가 아니고 돈대에서 바라본 풍경이다. 부석사의 아름다움은 건물보다는, 부석사에서 바라본 소백산 풍경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었던가? 이상엽 작가는 돈대를 주 피사체로 삼음으로써 돈대를 온몸으로 막아내야 했던 조선 민중들의 아픔을 제삼자의 관점에서 바라본 것이 아니고, 그 당시 초병들의 시각으로 들어가 그들의 눈으로 보았던 강화도의 풍경과 민중들의 고난을 이해하려 했다고 생각한다.
'인디고'는 지난 2010년부터 나오기 시작한 '국제'인문학 잡지다. 국제적인 잡지답게 영미 권뿐만 아니라 이탈리아에도 수출되는데 더욱 놀랍게도 우리가 저서로만 만나는 세계적인 석학들과 대담을 하고 그들의 글을 받아서 잡지를 만든다. 하워드 진, 놈 촘스키, 슬라보예 지젝과 같은 당대를 이끌어가는 사상적 원류인 석학들은 모두 인디고와 대담을 했다.
부탄의 초등학교는 영어로만 수업이 진행된다. 부탄의 모국어인 종카어 수업만 제외하고 나머지 수업은 모두 영어로 진행되는데 놀랍게도 부탄 주민의 약 80% 이상이 영어로 대화할 수 있다고 한다. 어린 아이들뿐만 아니라 산속에서 사과를 파는 아낙들도 기본적인 영어 대화는 충분히 가능한 나라가 부탄이다.
적어도 책을 읽었으면 뭐라도 해야 한다는 신념을 지니고 있는 독자들의 입장에서는 제갈인철이야말로 신세계를 개척한 탐험가라고 추앙할 만하다. 그 누구도 생각지 못했던 가설 즉 문학은 노래다라는 것을 입증하고 실천해온 '북뮤지션' 이기 때문이다. 그간 무려 150여 곡의 '소설 노래'를 작곡했고 500여 회 이상의 공연을 해온 제갈인철의 공적은 뻔한 말로 독서를 장려하는 그 어떤 독서운동가의 노력과 성과에 뒤지지 않는다.
4·3과 필화사건에 관한 행적은 뒷이야기로 다루어질 뿐이다. 희한하게도 우리 현대사에서 군사정권과 맞서 싸우다가 오랜 수형생활과 고초를 겪은 분들의 저서는 일상생활과 작은 것들의 소중함을 이야기한 경우가 많다. 홍세화의 <나는 빠리의 택시운전사>, 신영복의 <청구회 추억>, 황대권의 <야생초 편지>와 더불어 시인 이산하의 <양철북>도 그런 경우에 속한다.
요양원에 계신 어머니께 전할 고향 마을 소식은 '아무개가 죽었다'라는 소식 말고는 딱히 없다. 끊임없이 부고를 전해야 했고 이제는 고향마을의 끝에 위치한 옛 고향집에 도착할 때까지 단 한 명의 주민도 만나지 못할 때가 흔하다. 마치 촬영이 끝난 영화세트장 같은 유령마을인 것처럼 느껴질 정도다. 부사관을 하다가 장기복무에 탈락한 친척동생은 고향마을로 돌아와 농부가 되었다. 고용의 시대에 고향마을을 떠났던 청년들은 중년이나 노년의 나이가 되어서 자의반 타의반 고향으로 돌아왔는데 이는 고용의 시대가 종말 했음을 의미한다.
취미라는 것이 확실히 정도의 차이지만 돈과 시간이 든다. 그렇다고 '내 팔자에 무슨 취미냐'고 지레 포기할 일은 아닌 것 같다. 취미생활의 즐거움 때문만이 아니라 취미생활이 건강에 미치는 영향을 고려하면 스스로 기를 쓰고 찾아내고 쟁취해야 하는 대상이라고 본다.
남자가 죽기 전에 꼭 해봐야 할 일 중에 하나가 '어머니를 손수 간병해보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나 혼자만의 특수한 경험인지는 모르나 내가 중풍으로 쓰러지신 어머니를 돌봐보지 않았다면 어머니의 손이 그렇게 크다는 것도 영원히 몰랐을 것이고, 손수 씻겨드리지도 않았을 터였다. 2002년에 새벽녘 밭에서 쓰러지시고, 늘 함께 다니던 애완견의 애탄 구조요청 덕분에 간신히 병원으로 옮겨지신 어머니는 우리 집을 포함해서 정확히 12곳의 병원, 요양병원, 거처를 옮겨 다니셨고 그 모든 행선지는 내가 결정하고 함께했다. 내가 12년간 주로 남의 손을 빌려 어머니의 끼니를 봉양했다면 <나는 어머니와 산다>를 출간한 한기호(한국출판마케팅 연구소 소장)씨는 치매초기의 어머니의 삼시세끼를 손수 봉양해오고 있다.
사진집 <두 면의 바다>는 오직 사진 감상 그 자체에 집중하도록 배려한 보기 드문 사진집이다. 장정이나 내지의 고급스러움 때문이 아닌 디자인과 사진의 배치로 독자들이 사진에 집중할 수 있도록 한 시도가 참신하다. 이 사진집의 편집상의 가장 큰 특징은 표지에 책 제목이 없다는 것이다. 표지에 제목이 없는 책(사진집)은 적어도 나는 처음 보았다. 게다가 사진가의 이름조차 없다. 이 놀라운 시도의 의도는 분명하다. 독자들이 사진에 집중할 수 있도록 배려의 차원에서 나온 발상이다.
고양이는 우리가 알고 있는 것보다 훨씬 오래전 즉 기원전 4000년경부터 인간의 반려동물이었지만 여전히 길들여지지 않은 야생 본능이 남아 있다. 고양이의 숨겨진 야생 본능을 가장 쉽게 눈치챌 수 있는 것이 바로 사람들이 보기에 '고양이가 장난감을 가지고 노는 귀여운 행동'인데 저자의 실험에 의하면 고양이는 장난감을 가지고 노는 것이 아니고 진지한 목적의 행동, 즉 사냥을 하는 것이다. 고양이는 장난감을 진짜 동물로 생각하고 있어서, 당연히 털이나 깃털이 있고 다리가 여러 개 달린 생쥐 크기의 장난감을 좋아하는 것이다. 고양이가 변덕이 심해서 자주 장난감에 싫증을 내는 것이 아니고, 그 장난감이 '사냥감'스럽지 않아서 그렇다는 결론을 생각해 낼 수 있다.
지허스님은 서울대를 나왔다거나 1975년에 이미 입적했다거나 하는 소문 또는 진술이 있긴 했지만 모두 확실치는 않다고 2010년에 나온 재출간본의 편집자들은 밝히고 있다. 지허라는 법명도 사실 필명일 가능성이 높고, 조계종에서도 신원을 확인할 방법이 없다고 한다. 강금실 전 법무부장관의 말처럼 '책만 남기고 사라진 사람'인 것이다. 이 책을 되살리려는 불광출판사의 노력은 눈물겹기까지 하다. <선방일기 저작권 조회 공고>를 내고, 각처에 지허스님의 행방을 문의하였지만 이 모두 허사로 돌아가서 결국 '한국저작권위원회의 법정허락 제도(공탁)'을 통해서 간신히 출간을 했다.
솔직히 나는 장르소설을 즐기지 않아서 <아발론 연대기>도 감탄과 경외만 했을 뿐 그 비싼 가격에 대한 부담도 되고 해서 사지도 못한 처지였다. 더욱 솔직하게 말하자면 나는 '그때 그' <북스피어>가 여태껏 살아 있다는 게 신기했고 반가웠다. 10년 동안 잊고 있었던 이름이었던 게다. 그러나 10년 전 출현할 때부터 이미 범상치 않은 출판사와 그 사장이란 것은 충분히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의 출판인생과 주변이야기를 담은 책이라니 1초의 주저함도 없이 주문을 했고 받자마자, 들고 다니던 소설책을 집어 던지고 이 책에 빠져들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