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여자 캐릭터 이제 그만.
'더 스킴'과 '디에디트'는 그럴 수 있다고 믿는다
정말 중요한 질문은 무엇일까
지금까지 누적된 페미니즘 운동의 결과
메갈리아·미러링으로 대변할 수 있는 최근 페미니즘 운동의 최대 성과는 misogyny를 '해결해야 할 골칫거리', 날 것의 정치적 갈등축으로 부상시키며 가시화했다는 점이다. 여성혐오란 번역어의 선명함과 직관성은 논란을 불사르며 여성 의제를 급속히 전파했다. 더 원만하고 중재적인 표현으론 이게 안 된다. 단순한 논란을 넘어 의제의 심화도 일어났다. 가령 여성혐오란 번역어를 채택했기에 misogyny의 적확한 번역어는 무엇이며 그에 앞서 misogyny가 무엇을 뜻하느냐는 세부 논쟁이 촉발된 것이다. 나무위키와 남초 커뮤니티에서조차 '미소지니'가 상용어가 된 것은 여성혐오란 낱말의 힘이다.
신경림의 '농무'라는 유명한 시 중에 "비료값도 안 나오는 농사 따위야 /아예 여편네에게나 맡겨두고"라는 구절이 나온다. 미소지니라고 충분히 비판받을 수 있는 부분이다. 울분과 저항의 장에서조차 여성을 몰아내려는 시인의 잘못된 여성관이 드러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 작품이 윤리적으로 문제가 있고 이런 작품을 쓴 시인은 지금이라도 모든 여성들 앞에서 자기반성을 해야 할까? '농무'가 비료값도 안 나오는 농사 따위는 집어치우고 집사람을 데리고 신명나게 농무를 추는 것으로 표현되었다면 더 훌륭한 작품이 되었을까?
'여성혐오'의 원어인 misoginy는 여성을 싫어한다거나 증오한다거나 하는 뜻이 아니라 "남성지배를 용이하게 하기 위한 모든 전략"이라고 보는 것이 더 원래의 의미에 가깝다. 그럴 경우 문자 그대로의 '여성혐오'만이 아니라, 여성 보호, 여성 존중, 여성 애착 등 겉보기에는 매우 여성친화적으로 보이는 태도들 역시 차별적인 젠더역할을 고정화시켜 남성지배의 구조를 영속화시킨다는 점에서 분명 '미소지니'이고, 황수현 기자는 이런 맥락에서 류근 시인의 시들 역시 '여성혐오'의 반열에 위치지은 것이다. 이것은 매우 논쟁적인 문제이기는 하지만, 오늘날의 페미니즘에서는 또한 매우 상식적인 견해이기도 하다.
불행한 일을 당하면 누구나 그 불행을 책임져야 할 사람을 찾아내고 싶어 한다. 탓할 사람을 찾아내지 못한 불행은 지금 눈앞에 닥친 불행보다도 더 고통스럽다. 미국 사회에서 깊은 절망에 빠져 있는 중하류층 백인들에게 샌더스는 그 책임이 그들에게서 돈을 빼앗아간 월가의 부자들에게 있다고 말하고, 트럼프는 그들에게서 일자리를 빼앗아간 이민자들에게 있다고 말한다. 비슷한 처지에 있는 한국의 젊은 남자들은 잘나가는 여자들과 페미니스트들에게 그 책임을 돌리려 한다. 그러고는 다시 왜 자신이 저지르지도 않는 여성혐오의 혐의를 둘러써야 하느냐고 묻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