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맥락은 제쳐두고라도 문학상이란 우선 수상하는 시인과 작가에게는 '명예'를 주는 일이다. 더욱이 그 문학상에 역사적 인물의 이름을 붙인다면 그 명예에 힘입어 더욱 영예로울 수 있다는 보편적 신뢰나 합의가 있어야 한다. 하지만 미당 서정주는 과연 그 이름으로 상을 줘도 좋을 만큼 보편적으로 명예로운가? 아무도 선뜻 그렇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런데도 그 이름으로 벌써 16회째 시상이 이루어졌고 황동규·정현종·최승호·김기택·문태준·김혜순·문인수·송찬호·김언·장석남·이영광·권혁웅·황병승·나희덕·최정례·김행숙 등 쟁쟁한 시인들이 역대 수상자로 이름을 올리고 있다.
'창비 부설 세교연구소 임원급의 문학비평가'가 저입니다. 저는 세교연구소 회원이고, 지금은 2년째 세교연구소 이사를 맡고 있으며, 문학비평을 하고 있으니 저를 형용하고 있는 사실들은 틀린 게 없습니다. 그런데 나머지 대목은 전혀 사실과 다릅니다. 저는 계간지 <창비>에 글을 쓰기도 하지만, 외부 필자로서 청탁에 응해 그렇게 합니다. 여기에 대해서는 더 구구한 설명을 드리지 않겠습니다. 그저 저는 한 사람의 문학평론가입니다. 청탁을 받아 글을 쓸지언정, '오더'를 받아 글을 쓰지는 않습니다. 이것은 저 자신의 '인격'으로, '자존심'으로 지켜지고 보호받아야 할 사실이라고 생각합니다.
10월 초 창비 부설 세교연구소 임원급의 문학비평가와 며칠 여행을 같이 하게 됐던 한 친구의 말에 따르면, 당시 창비 핵심으로부터 그 비평가에게 창비와 백낙청을 옹호하라는 '오더'가 수차례 떨어졌다고 한다. 놀랄 일 아닌가? 아마도 그에게만 그 일이 일어나지는 않았을 것이다. 창비의 창비스러움은 처음엔 백낙청 개인의 권위주의적 성격 때문에 불거졌지만, 이젠 그 개인을 넘어 창비라는 조직이나 진영의 신뢰와 관계된 문제가 되었다. 작가는 사과하고 뒤로 물러났는데, 정작 창비는 사과하기는커녕 오히려 자신의 조직을 지키라는 지침을 보냄으로써 소위 공부하고 글 쓰는 사람들을 조직원으로 여기고 있음이 드러났다.
신경숙과 문학권력에 대한 비판자들이 자신의 동기를 달성하기 위해 필요한 자비의 원칙을 지켰는지 의문이다. 신경숙의 작품 전체가 형편없다는 견해는 신경숙 작품들에 대한 그간의 비평과 대중의 반응을 고려하면 신빙성이 떨어진다. 명성을 얻었고 작품 수도 많은 작가들이 대개 그렇듯이 신경숙 또한 걸작과 졸작을 모두 생산했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 그런 작가가 한두 작품의 몇몇 구절에서 표절로 판단할만한 치명적인 잘못을 저질렀다면, 그 점에 근거해 그의 작품 전체를 쓰레기라는 듯이 발언하기보다는 왜 그런 일이 발생했는지 분석해봐야 한다. '상습적 표절,' 그러니까 도벽이 있다는 식으로 간단히 해석해치우는 것은 자비의 원칙에 입각하면 받아들이기 어렵다.
의도적 절도로서의 「전설」이나 상습범 신경숙을 단정했다가 그간의 논의를 통해 '의도'를 가정한 비난이 부적절하다는 점을 새삼 발견한 것이라면 스스로 그러한 비난에 얼마나 동조했는지도 솔직히 밝히는 게 옳다. 또한 그동안 신경숙의 '의도적 베껴쓰기'를 인정 안한다고 창비에 퍼부은 공격은 어찌되는 것인가. 창비가 다른 많은 것을 더 했어야 한다는 비판은 마땅히 감수해야 하겠지만 창비의 '묵언'과 '입장표명'은 '의도'에 대한 단정을 근거로 한 작가를 매장하는 일에 가담할 수 없다는 것이 아니었던가. 신경숙의 사과에 대해 대다수 비판자는 의도적 베껴쓰기를 자백하지 않았으므로 진정한 사과로 받아들일 수 없다는 공격을 계속했으며 창비의 머리글이 계속해서 비난받은 것도 같은 맥락이었다.
신경숙과 문학권력에 대한 비판을 극단적으로 정형화시켜 놓고, 그 논리에 문제가 있다면서 창비의 입장을 정당화하는 것은 설득력도 없고 아름답지도 않습니다. 당신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비판자들은 훨씬 다양한 입장을 가지고 있습니다. 저만 해도 이응준 소설가가 신경숙 표절을 지적하던 바로 그날 페이스북 댓글에 "이 글로 신경숙 작가의 수작까지 매도할 필요는 없지만, 저는 당연히 표절이라고 생각하고 이에 대한 분명한 문제제기가 필요하다고 봅니다."라고 쓴 바 있습니다. 이런 입장이 김종엽 편집위원의 주장대로 신경숙 "작품 전체를 쓰레기"로 보는 건지 묻고 싶습니다. 창비가 이러한 프레임을 깨지 않는 한 어떤 생산적인 논의도 이루어지기 힘들 겁니다.
자비의 원칙을 논하려면 남들에게 그 원칙을 들이대기 전에 김종엽 혹은 창비는 자신들에게 먼저 그 원칙을 적용해야 한다. 김종엽은 "신경숙과 문학권력에 대한 비판자들이 자신의 동기를 달성하기 위해 필요한 자비의 원칙을 지켰는지 의문"이라고 불평하지만, 그 말은 그대로 창비에게 되돌려 줄 수 있다. 창비는 그동안 비판자들의 비판에 대해 "필요한 자비의 원칙을 지켰는지 의문"이다. 비평에서 자비의 원칙은 중요하다. 그렇다면 본질적인 비판의 원칙은 어디 갔는가.
늘 궁금했다. '문단(文壇)'이라는 단어가 대체 왜 필요한지. 작가는 홀로 글 쓰는 사람일 뿐이고 비평가는 소신 있게 평하는 사람일 뿐이지 않은가. 한때는 글과 관련된 이들을 통칭해서 그렇게 부르는 줄 알았는데 근래 오가는 각종 논의를 보니 아예 실체가 있는 모양이다. 어쩌면 '문단'이라는 단어가 왜곡된 시스템을 이미 반영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아무리 대외적으로는 진보와 민주와 평화를 논의하고 표방한들, 자신이 직접 동원하고 광고하고 형성한, 그래서 직접 자기 자신과 관계된 권력과 자본에 대해서는 아무런 진실성과 성실성을 보일 수 없다면, 그 집단의 지식과 문학성이 도대체 무슨 소용인가? 대표 지식인 그룹이라 자처하는 집단이 자신과 관계된 공적인 문제에서 비판적 거리를 확보하지 못한 채, 대외적으로만 진보적인 의제를 주장한다면 그것이야말로 문제가 많은 부패한 지식-권력의 복합체일 것이다. 나쁜 권력과 폭력을 휘두르는 자가 꼭 보수를 표방하는 사람이어야 하는 건 아니다. 아무리 진보적인 주제를 내세우거나 지지하는 사람이나 조직이더라도, 실제로는 얼마든지 폭력적이거나 기만적인 행동을 할 수 있다. 그런데, 지금 백낙청이 정점에 있는 창비 시스템이 바로 그 행태를 보인다는 사실에 사람들은 실망하는 것이다.
"끊임없이 의문을 제기해야 한다. 일종의 소소한 반항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개인들이 모였을 때 공감대를 얻어서 제도적인 변화를 만들 수 있다. 국가의 일이라면 생각도 하지 않고 동의하는 경우가 있다. 하지만 국가라는 이름 앞에서도 의문을 제기할 수 있어야 많은 것이 달라 질 수 있다."
문제는 이런 '무의식적 표절 행위'가 아니라, 문학을 '미문을 짓는 일'로 보는 관점이다. 신경숙 논쟁의 핵심에는 '어디까지가 표절인가' 하는 문제가 아니라, '아름다운 문장을 지어내는 것이 과연 좋은 문학인가' 하는 물음이 자리하고 있다. 신경숙 논란에서 다시 드러난 한국문학의 위기는 미문주의의 위기이다. 문학이 현실의 심연을 도발의 언어로 천착하지 못하고, 단지 그 표면을 아름다운 언어로 치장할 때, 문학은 이 성형의 시대에 감성의 화장술로 타락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