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사람들의 사고에는 '가족'만 있고 '나'와 '사회'가 없었다.
정부의 요란한 복지 사각지대 대책의 허점.
'서른, 아홉' 유영아 작가의 전작은 드라마 '남자친구'다.
주민 5명을 살해하는 등 22명을 사상한 안인득.
빨랐던 사회 변화, 늦었던 정부 대응, 구멍 난 보육 재정 ②
빨랐던 사회 변화, 늦었던 정부 대응, 구멍 난 보육 재정 ①
'창비 부설 세교연구소 임원급의 문학비평가'가 저입니다. 저는 세교연구소 회원이고, 지금은 2년째 세교연구소 이사를 맡고 있으며, 문학비평을 하고 있으니 저를 형용하고 있는 사실들은 틀린 게 없습니다. 그런데 나머지 대목은 전혀 사실과 다릅니다. 저는 계간지 <창비>에 글을 쓰기도 하지만, 외부 필자로서 청탁에 응해 그렇게 합니다. 여기에 대해서는 더 구구한 설명을 드리지 않겠습니다. 그저 저는 한 사람의 문학평론가입니다. 청탁을 받아 글을 쓸지언정, '오더'를 받아 글을 쓰지는 않습니다. 이것은 저 자신의 '인격'으로, '자존심'으로 지켜지고 보호받아야 할 사실이라고 생각합니다.
10월 초 창비 부설 세교연구소 임원급의 문학비평가와 며칠 여행을 같이 하게 됐던 한 친구의 말에 따르면, 당시 창비 핵심으로부터 그 비평가에게 창비와 백낙청을 옹호하라는 '오더'가 수차례 떨어졌다고 한다. 놀랄 일 아닌가? 아마도 그에게만 그 일이 일어나지는 않았을 것이다. 창비의 창비스러움은 처음엔 백낙청 개인의 권위주의적 성격 때문에 불거졌지만, 이젠 그 개인을 넘어 창비라는 조직이나 진영의 신뢰와 관계된 문제가 되었다. 작가는 사과하고 뒤로 물러났는데, 정작 창비는 사과하기는커녕 오히려 자신의 조직을 지키라는 지침을 보냄으로써 소위 공부하고 글 쓰는 사람들을 조직원으로 여기고 있음이 드러났다.
신경숙과 문학권력에 대한 비판을 극단적으로 정형화시켜 놓고, 그 논리에 문제가 있다면서 창비의 입장을 정당화하는 것은 설득력도 없고 아름답지도 않습니다. 당신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비판자들은 훨씬 다양한 입장을 가지고 있습니다. 저만 해도 이응준 소설가가 신경숙 표절을 지적하던 바로 그날 페이스북 댓글에 "이 글로 신경숙 작가의 수작까지 매도할 필요는 없지만, 저는 당연히 표절이라고 생각하고 이에 대한 분명한 문제제기가 필요하다고 봅니다."라고 쓴 바 있습니다. 이런 입장이 김종엽 편집위원의 주장대로 신경숙 "작품 전체를 쓰레기"로 보는 건지 묻고 싶습니다. 창비가 이러한 프레임을 깨지 않는 한 어떤 생산적인 논의도 이루어지기 힘들 겁니다.
아무리 대외적으로는 진보와 민주와 평화를 논의하고 표방한들, 자신이 직접 동원하고 광고하고 형성한, 그래서 직접 자기 자신과 관계된 권력과 자본에 대해서는 아무런 진실성과 성실성을 보일 수 없다면, 그 집단의 지식과 문학성이 도대체 무슨 소용인가? 대표 지식인 그룹이라 자처하는 집단이 자신과 관계된 공적인 문제에서 비판적 거리를 확보하지 못한 채, 대외적으로만 진보적인 의제를 주장한다면 그것이야말로 문제가 많은 부패한 지식-권력의 복합체일 것이다. 나쁜 권력과 폭력을 휘두르는 자가 꼭 보수를 표방하는 사람이어야 하는 건 아니다. 아무리 진보적인 주제를 내세우거나 지지하는 사람이나 조직이더라도, 실제로는 얼마든지 폭력적이거나 기만적인 행동을 할 수 있다. 그런데, 지금 백낙청이 정점에 있는 창비 시스템이 바로 그 행태를 보인다는 사실에 사람들은 실망하는 것이다.
보수의 관점에서 성장의 좋은 점만 강조할 필요도 없고 거꾸로 진보의 관점에서 성장의 나쁜 점만 과장할 필요도 없다. 또 모든 문제를 신자유주의로 환원하는 것도 우스운 일이다. 사람들이 세계로 내포되는 과정이 확대되면서 참여와 기회뿐 아니라 동시에 새로운 불만과 배제의 가능성이 높아지는 것이다. 요컨대 신자유주의가 등장하면서 갑자기 사회적 배제가 사회적 통합을 대체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사회적 내포를 통해 사람들을 사회 내부로 흡수하는 통치 과정은 근대 이후 점점 확대되었으며, 그 과정에서 기회와 동시에 다시 배제와 차별의 위험도 불균등하게 생긴다.
우파의 선동과 인종주의가 합쳐진 이슬람 공포증과 정당한 이슬람 비판을 분간하지 않으려는 좌파의 위선은 쿠아시 형제의 범죄를 무조건 인종차별과 계급갈등의 폭발로만 해석한다. 그러나 범행 직후 쿠아시 형제는 '알라는 위대하다!'고 외쳤지 '이슬람을 차별하지 말라!'거나 '우리에게 일자리를 달라!'고 외치지 않았다. 이슬람은 미개한 때문이 아니라 한때 너무 영광스러운 역사가 있었다는 것이 문제다. '옛날에 우리집 부자였어'라는 이들의 자원은 열등감이 아니라 턱없는 자긍심이다. 바보들만 이 역설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