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씨도 쾌청하고, 새 대통령의 행보도 산뜻해 기분 좋은 오월이었지만, 진보언론과 문재인 지지자들의 갈등으로 SNS는 한동안 벌집 쑤셔놓은 것 같았다. 이제 먼지가 가라앉은 듯하지만, 재연 가능성이 없지 않다. 그래서 이 문제를 다뤄보려 한다. 가라앉은 먼지를 들쑤시지 않기 위해 구조적으로 접근해보자. 논의의 실마리로 한 정치인이 했다는 말을 인용하고 싶다. "정치인이 다 아는 걸 기자만 모르고, '국민'이 다 아는 걸 정치인만 모른다." 멋지지만 냉소적이고, 냉소적이지만 교훈적인 경구이다. 하지만 완벽하진 않다. 논란이 된 갈등을 다루려면, 마찬가지로 냉소적이지만 교훈적인 말로 빈 고리를 채워 넣어 무지의 삼각형을 완성해야 한다. "기자가 다 아는 걸 국민만 모른다."
물론 지금까지 촛불이 이룬 성과만으로도 참여자인 우리들은 기쁘고 자긍심을 가질 만하다. 우리들 각자가 밝혔던 촛불이 그려낸 거대한 점묘화는 숭고한 감정마저 불러일으킨다. 하지만 혁명은 자유를 한단계 더 높은 수준으로 제도화하고 사회적 궁핍에서 벗어남으로써 자유의 토대를 공고히 하는 것을 뜻한다. 그런 점에서 비춰보면 촛불혁명은 87년체제 아래서 이루어진 최량의 정치적 성과 중 하나지만, 현재까지는 87년체제의 수호에 머무르고 있다. 촛불'혁명'이 그 이름에 값하는 성과를 이루기 위해서는 해결해야 할 과제들이 남아 있으며, 그것이 무엇인지는 제법 분명한 것 같다.
반문 정서라는 약한 지렛대에 기댈지언정 우리 사회 보수 유권자들을 자신의 지지층으로 끌어들이는 만큼 그들을 수구 또는 극우 정치인들의 주박(呪縛)으로부터 풀려나오게 할 수 있으며, 그럼으로써 우리 정치 지형을 중도와 상식으로 수렴하는 데 크게 기여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런 안철수의 대의가 지금 크게 흔들리고 있다. 보수 유권자들이 안철수를 떠나 홍준표를 지지하며 수구의 품으로 상당 정도 귀환하는 경향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이런 보수 유권자의 퇴행적 복귀가 우리 정치에 드리우는 그늘은 매우 짙고 서늘한 것이다.
박정희 전 대통령에게 마땅하고 올바른 상징적 죽음의 형식은 무엇이었을까? 두 번의 쿠데타를 저지르고 숱한 사람을 고문하고 살해하며 권력을 유지했던 자에게 적합한 상징적 죽음은 독재자에게 저항하는 민중의 봉기에 의해 권좌에서 쫓겨나는 일이어야 마땅하다. 그러므로 박근혜 전 대통령이 겪은 탄핵과 구속은 어떤 의미에서 아버지가 받아 마땅했던 상징적 죽음을 완수하는 과정이었다고 할 수 있다.
광장을 일부 점유한 친박집회에는 두려움을 유발하는 무엇인가가 있다. 그것은 일차적으론 집회 참석자들의 거리낌없고 공격적인 말 때문이다. 생각해보면 대한민국 정부 수립, 뒤이은 전쟁, 그리고 쿠데타는 누군가를 살육하고, 간첩으로 몰고, 감옥에 처넣는 적대의 정치에 입각한 것이었다. 그런 역사가, 이편에 서 있다면 온갖 불의와 불법과 부패를 저질러도 이편을 지키기 위한 것으로 인정되고, 이편에 서 있기만 하면 저편을 마음대로 유린해도 좋다는 믿음을 형성해온 것이다. 이편에 있기만 하면 당연히 면책특권이 발부된다는 믿음이 특검과 헌재를 겁박하는 말을 할 용기의 원천인 셈이다. 요컨대 이들의 목소리는 대한민국에 대한 저작권, 다시 말해 이 나라는 '우리'가 만들었고, 그 '우리'가 누구인가는 항상 '우리'가 정의한다는 주장에 터잡은 것이다.
가장 중요하고 어려운 과제로서 '교육 마피아'를 척결해야 한다. 이들은 교육부 고급관료만이 아니다. 비리사학의 '소유주'들 외에도 각종 위원회에서 교육부의 충실한 꼭두각시 노릇을 하거나 장차관 자리를 꿰차는 교수들을 포함하며, 교육부 출신으로 교수, 총장, 이사(장)으로 변신하는 이들도 잊어서는 안 된다. 이들의 실상은 아직 대중에게 충분히 폭로되지 않았다. 총장 외의 주요 비리 관련 교수가 다 구속된 이화여대의 경우, 지원한 정부 재정지원사업이 모두 선정된 일은 '비선실세'와 더불어 교육부의 조직적 공모자(들)이 있어 가능했을 것이지만 아직 진상은 숨어 있다.
고려대의 정책은 장학금이란 본래 면학을 지원하는 것이지 좋은 성적에 따라붙는 부상 같은 게 아님을 되새겨 주었다. 또한 이런 정책에 내포된 규범적 태도는 우리 사회 여러 관행에 대해 교정 효과를 지닌 것이기도 하다. 우리 사회에서는 성취와 보상을 연계하는 것을 당연시하고 또 그것을 제도적으로 뒷받침한다. 이에 비해 성취를 위한 조건의 균등화를 뒷받침하는 제도는 심각하게 부족하다.
정치권에 의한 주도권 행사가 뜻하는 바에는 하나로 뭉친 촛불시민을 후보별 지지자 집단들로 분해하는 것도 들어있다. 이런 분해가 심화되면, 후보 간 경쟁이 지지자 집단 사이의 갈등과 반목으로 증폭되기도 한다. 지난 6일 민주정책연구원의 개헌 관련 보고서가 야기한 논란은 SNS 상에서 이런 갈등이 '이미' 상당한 수준에 이르렀음을 시사한다. 문재인 후보가 자신의 지지자들의 자제를 '절박하게' 요청할 정도였으니 말이다. 선거경쟁에서 지지자 집단 간의 갈등은 어느 정도 불가피하지만, 심해지면 정권 교체라는 목표 자체를 위협한다. 지지자들의 협량함은 그들이 지지하는 후보에 대한 불신으로 이어진다.
그것은 지금과 달리 폭력 시위라고 한다면, "지금은 맞고 그때는 틀리다"는 식의 논법에 대해 이렇게 묻고 싶다. 도대체 광화문에 170만이 넘게 모여 집회를 해도 부상자 한 명 연행자 한 명 없었다는 건 무엇을 뜻하는가? 경찰의 압박 없이 자유롭게 의지를 표명할 수 있으면 아무 문제도 생기지 않는다는 걸 입증하지 않는가? 집회의 자유가 대한민국 역사를 통해 가장 눈부시게 빛난 지금, 집회의 힘이 국가 개혁의 물꼬를 연 지금, 물대포로 사람을 죽이는 진압이 있던 집회의 책임을 엉뚱하게도 한상균 위원장이 3년의 징역형으로 뒤집어쓰는 일은 용납할 수 없는 불의(不義)이다.
혹자는 민중의 열망이 제도화되지 못하고 실망으로 귀결된 과정을 되짚어보며 광장의 민주주의가 가진 한계를 말한다. 저명한 정치학자가 도식화한 "열망/실망의 사이클"을 인용하고, '수동혁명' 같은 개념을 빌려 대중의 열망을 무산시키려던 보수·수구 세력의 방어조처들을 중심으로 현대사 전반을 조명하기도 한다. 지금은 실망의 가능성을 예상함으로써 실망에 정서적으로 대비하려 하거나, 보수세력의 방어 또는 반격 능력을 걱정하며 소심해지기보다는, 우리의 열망에 충실해질 때이고, 필요하다면 다시 거리로 나가려는 자세를 가질 때이다.
지금 우리는 최순실이 옆에 없는 대통령에게 누가 그 역할을 하는지 계속해서 묻고 있다.
마침내 마지막 환상이 깨졌다. 돈 따위엔 관심 없는 줄 알았던 대통령이 재벌들의 돈을 모금했다. 가족이 없는 줄 알았던 그에게 가족이나 다름없는, 아니 가족보다 더한 이들이 있었다. 그렇지 않고야 그토록 많은 국가기관과 그 많은 재벌 그리고 '명문' 이화여대까지 나서서 대통령의 친딸이라 해도 믿기지 않는 권세를 최순실씨의 딸에게 안겨주었겠는가. 뭐라 해도 공심만은 가졌으리라 믿었던 박근혜 대통령도 공심이 없었던 셈이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자면 그는 공심과 사심의 구별 이전, 자신의 모든 사심이 곧 공심이라고 믿는 사람이었던 것이다. 모든 환상이 깨진 자리에서 우리는 이 한 많고 복수심 많은 대통령을 망연히 바라보고 있다.
한반도 주민이 핵폭탄과 원전을 모두 끌어안고 위험하게 살고 있다는 것을 절실히 느끼지 못하는 이유는 분단 상황이 두 가지를 분리시켜 생각하게끔 하기 때문이다. 확실히 분단으로 인해 남북은 서로 다른 경로를 밟아왔다. 북한은 빨치산 국가에서 출발하여 사회주의권의 붕괴 이후로는 유례없이 폐쇄적인 농성체제가 되었는데 핵은 그런 행로의 끝에 있다. 이에 비해 남한은 세계체제의 분업 구조에 깊이 참여해 경제성장과 민주주의를 이룩했다. 하지만 활성단층대의 존재를 안 이후에도 추가 원전 건설을 추구해온 것이 보여주듯이, 남한이 이룩한 성과는 엄청난 무모함, 무책임, 그리고 근시안과 결합된 것이었다.
왜 그런 것일까? 내가 보기에 그 이유는 우리 사회에서 입시제도에 영향력이 큰 집단들이 나름의 이유로 수시전형에 찬성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선 대학이 이 제도를 좋아하는데, 그 이유는 입시에서 막대한 재량권 행사와 불투명성이 허용되기 때문이다. 몇 년 전 고려대는 고교등급제를 실행한 것이 들켜 홍역을 치렀다. 하지만 지금은 '사실상' 고교등급제를 실시한다고 해도 그 모든 과정이 학생부 위주 전형 안에 녹아든 재량 속에서 은폐되어 버린다. 교사들도 학생부 위주 전형이 마음에 든다.
법안대로면 대학이 문을 닫아 실직하는 교직원에게는 대통령령에 위임되어 얼마가 될지 알 수 없는 직업훈련비와 명예퇴직 수당을 던져주고, 졸지에 학교가 없어진 학생에게는 그 학기 등록금을 돌려주는 정도로 퉁치는 대신, 법인 이사나 특수관계자는 수십년간 등록금과 정부지원으로 불어난 잔여재산을 살뜰히 털어갈 수 있게 해주는 것 말이다. 가히 개돼지와 사람이 따로 있는 '신분제 강화' 법안이라 할 만하지 않은가.
고시공부를 하며 외롭게 법전을 뒤적이고 시험문제를 풀어보던 20대부터 언젠가 40대가 되면 검사장이 되고 그러면 비상장회사의 주식을 거저 얻을 기회가 생길 것이라 생각했던 것일까? 혹은 특수통이 되어 수사를 하면서 각종 재산 은닉과 탈세 기법을 배울 수 있을 거라 생각했던 것일까? 권력을 가진 고위 공직자로 살았으면 비상장 회사를 이용하든 전관예우를 활용하든 수십억 또는 수백억의 보상은 당연한 것 아니냐는 식의 생각은 또 어디서 온 것일까? 검사나 변호사로 산다는 것은 범죄와 싸우는 것이기보다 범죄와 멋들어진 미뉴에트를 한판 추는 것이라는 '깨달음'에는 대체 언제 도달한 것인가?
5·18이 고립과 왜곡과 매도에 여전히 갇혀 있는 지금, 한강의 '소년이 온다'는 왜 우리가 5·18을 생각하고 기념해야 하는지, 그래야 할 이유가 왜 새롭게 닥쳐오는지 말하고 있다. 그는 소설의 에필로그에서 이렇게 말한다. "2009년 1월 새벽, 용산에서 망루가 불타는 영상을 보다가 나도 모르게 불쑥 중얼거린 것을 기억한다. 저건 광주잖아. 그러니까 광주는 고립된 것, 힘으로 짓밟힌 것, 훼손된 것, 훼손되지 말았어야 했던 것의 다른 이름이다. 피폭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 광주가 수없이 되태어나 살해되었다."
공무원에게 필요한 기본은 공적인 마인드와 봉사정신인데, 다분히 선발을 위해서 복잡하게 꼬아놓은 시험을 준비하는 것이 그것을 형성하는 데 얼마나 도움이 될지 의문스럽다. 그보다는 밑바닥 대민업무 경험이 더 도움이 될 것이다. 그러니 공무원의 출발선은 9급 또는 7급인 것이 사회적으로 더 바람직할 수 있다. 게다가 행정고시가 폐지된다면, 공무원사회 전체에서 승진의 전망이 넓어지는 만큼 헌신적이고 창의적인 업무태도 그리고 엄격한 자기관리 풍토도 강화될 것이다.
야권도 아전인수에서 크게 뒤지지 않는다. 김종인 대표 덕에 이겼다. 아니다, 그의 셀프공천으로 인한 역풍을 문재인이 겨우 막았다. 무슨 소리냐, 문재인의 호남 방문은 아무런 효과도 없었다. 아니다, 그 덕에 수도권에서 결집이 이루어졌다. 국민의당은 호남에 갇혔다. 아니다, 정당지지율에서 더민주를 능가하며 전국정당화를 이뤘다. 오히려 더민주야말로 수십년 문전옥답을 잃었다. 모두가 야단스럽고, 엄밀히 말하면 근거가 박약하고 정치적으로 위험한 해석들이다.
총선을 생각하면 먼저 떠오르는 장면이 있다. 지난 19대 총선 날이었다. 아침나절 투표를 마치고 마루에 앉아 티브이로 투표 중계를 보고 있는데, 초인종 소리가 나서 문을 여니 택배기사였다. 그가 건네준 물건은 이틀 전 온라인서점에서 주문한 책이었다. 잔뜩 짐을 든 택배기사에게 "이렇게 배달 물건이 많으면 투표하러 가기도 쉽지 않겠네요?" 하고 물었다. 그러자 그는 "우리 같은 사람들이 투표할 짬이 나나요"라고 퉁명스럽게 말하곤 엘리베이터 안으로 총총히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