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다고 세상이 변하지 않지만, 이런 세상에 나 같은 놈 하나는 있어서 나쁠 건 없지”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대박대박
최불암 선생님을 빼고 이 드라마를 이야기할 수 없다
'마녀사냥'이라고만 간단히 부르긴 좀 어렵다.
산초는 자신의 신념을 쏟아 ‘산초 그 이상’이 되고, 산초는 그렇게 돈키호테가 된다.
블록체인 기술의 활용가능성이 유망하다는 등의 전문가 견해를 지나치게 힘주어 발표함으로써 자신이 산 비트코인의 시세를 스스로 받치려는 미필적 고의가 있는 것은 아닌지 가슴에 손을 얹고 물어 볼 일이다. 알게된다면, 최소한 내 마음 속으로는 그 사람에 관한 레이팅rating을 수정할 것이다.
여기, 2018년의 대통령 신년사를 꼼꼼히 읽고 있는 노인이 있다. 직장 맘이 있고, 명예퇴직한 실버가 있으며, 고국에 대한 애끓는 향수를 가진 해외동포가 있다. 그들이 과연 이 번 신년사를 일독한 후 얼마나 흡족했을까. 일부는 기뻤고 일부는 서운했을 것이다.
인간은 동물의 차이는 '내일 보자'라고 말할 수 있는 '미래'에 있다. 동물은 미래(를 알 수)가 없기에 '미래'를 말할 수 없다. 그래서 인간은 미래를 '발명'한 것이다. 우리는 과거의 예외적인 것으로 현재를 표상할 수 밖에 없다. 그래서, 묻는다. 미래는 현재와 같을지, '더 나은 내일'일지. 그리고, 말한다. 내일 보자.
영화 '블레이드 러너 2049'와 책 '철학자와 늑대'의 동시 후기를 쓸 생각을 한 것은 실은 이 영화의 엔딩크레디트 때문이다. 수많은 참여자들의 이름이 열거되고 슬슬 지겨움의 끝이 보일 때쯤, 'AHA 인증' 문구가 등장했다. 아무 동물도 해를 입지 않았다고? 아까 개가 위스키를 핥아 먹었었는데?
엑스맨(X-men) 시리즈의 울버린(Wolverin)이 다른 모습으로 찾아왔다. 이 영화는 인생의 여러 신산을 겪은 중년들이 삼삼오오 모여서 관람한 후, 화려했던 소시적의 무용담이 아닌 늙어버린 자신들의 현실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며 소주 한 잔 기울이기에 적당하다. '베기'와 '썰기'가 난무하는 영상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 볼 만하다. 알다시피, 울버린은 재생회복의 능력을 지닌 돌연변이 투사다. 너클(knuckle)에서 튀어나오는, 아다만티움 광석으로 만든 커다란 칼날들을 휘둘러 닥치는대로 파괴한다. 심지어 늙지도 않는다. 그런 근육질이었던 불사의 울버린이 폭삭 나이들어 절뚝거리며 화면에 등장할 때부터, 중년 관람객은 몰입될 수밖에 없다.
TV뉴스의 화면은 '촛불'과 '태극기'를 나란히 배치하면서 도심의 풍경을 전한다. 탄핵심판에 관한 헌법재판소의 결정에 대하여, 그 이후에 일어날 분열이 더 염려된다는 이야기들을 주위에서 많이 듣는다. 최근의 여러 기사나 칼럼 등에서도 그런 우려를 느낄 수 있다. 한편, 앞으로는 매 정권마다 촛불이 등장하는 것이 법치주의와 민주주의에 부합하는 것인지, 국가의 상징인 태극기를 특정 진영의 상징으로 사용되는 것이 타당한지 등에 대한 토론도 심심찮게 벌어지고 있다. 촛불이 가지고 있는 '불'의 상징과, 태극기 휘날리는 '바람'의 상징은 일종의 천적관계다.
'마이크로소프트의 링크드인 인수'와 '페이스북의 블리자드 협업'. 두 개의 뉴스는 얼핏 서로 관계가 없어 보일지도 모르나, '인공지능'이라는 관점으로 보면, 묶어서 고민해볼 많은 의미와 시사점을 담고 있다. 내 생각으로는, '머신러닝(machine learning)의 연료(fuel)를 획득하다'라는 한 문장으로 두 기사의 공통분모를 정리 할 수 있다. 다만 이를 위한 마이크로소프트와 페이스북의 접근 방식은 무척이나 다르다. 한쪽은 31조원을 들여 사 버리고, 한쪽은 일단 같이 협업하면서 파악할 시간을 가진다.
온라인 상에서의 개인정보의 수집과 이를 이용한 프로파일링에 대하여 사람들이 슬슬 불안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오프라인에서의 나'와 '온라인에서의 나', 그리고 각 플랫폼 서비스들이 빅데이터 수집 결과를 모아서 잠정적으로 결론 내린 '특정 플랫폼에서의 나'가 각기 다를 수 있기 때문이다. '추단된 나'가 '실제의 나'가 아님을 내가 직접 스스로 설명하거나 부인하여야 하는 상황이 곧 벌어질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기도 하다. 예를 들자면, 소셜커머스 업체는 나를 축구 팬이라 오해하고 있고, 인스타그램은 내가 된장찌개나 맥주보다 파스타와 와인을 좋아하는 사람이라 잘못 분류하고 있다.
어느새 채팅 봇이 뉴스를 알려주는 시대가 되었다. 애플의 시리(Siri)나 아마존의 알렉사(Alexa)는 여전히 제 역할을 톡톡히 수행하고 있다. 최근에는 페이스북도 챗봇(Chat-Bot)에 깊은 관심을 보이고 있다. 그런데, 텍스트 기반이 아니라 형체를 띤 봇이 눈 앞에 등장하면 어떨까. 물리적 형태를 가진 소프트뱅크의 페퍼(Pepper) 같은 로봇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나는 지금 챗팅 봇(Chatting Bot)이 홀로그램(Hologram)이라는 외피(外皮)를 입으면 어떨까를 상상하는 중이다.
사람들이 느끼는 공포와 충격에 대하여, 누군가는 "알파고가 승리하더라도 이는 우샤인 볼트보다 더 빨리 달리는 자전거나 자동차를 만든 것과 같을 뿐이다"라고 달래며 이야기한다. 글쎄다. 그런데 위로하는 그 말이 실은 더 무서운 의미를 담고 있다. "우샤인 볼트보다 더 빨리 달릴 수 있는 자전거나 자동차를 만든 것"때문에, 더 이상 사람들은 우샤인 볼트처럼/만큼 빨리 달릴 필요를 못 느끼게 되었고 노력도 하지 않게 되었지 않은가. 또 누군가는 말한다. 인공지능이 아니라 '바둑'이라는 게임을 잘 하는 프로그램에 불과하다고.
바둑은 모양을 중시한다. 오청원 9단은 바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조화(調和)라고 했다. 바둑은 형세가 집(家)이 되고 집이 많으면 이긴다. 이런 바둑이라는 게임을 단순히 초반 포석, 중반 전투, 마지막 끝내기 등의 의미로만 분해하는 것은 아주 어색하다. 그래서, 바둑 분야의 컴퓨터 대결은 '모양'(image) - 혹은 패턴(pattern) - 에 관한 형세 판단 능력을 어떤 방식으로 다루는지가 중요하다. 알파고와 이세돌 9단의 제1국을 보고, 알파고의 '패턴 분석'에 깜짝 놀랐다. 기계는 '두터움'을 모를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감성적인 첫 느낌과 이성적인 두 번째 감정을 각 순차로 다르게 누적표현하게 해 주는 것이다. 다양한 감정 중 하나만 선택하여 그 데이터를 쌓는 것은 '빅데이터' 연구를 위한 자료가 되겠지만, 여러 감정의 기복까지도 담는 것은 '인공지능' 연구를 위한 더 좋은 자료가 될 것이다.
화질이 선명하든 않든, 어딘가에서 누군가는 열심히 콘텐츠들을 빈지와칭(binge-watching, 몰아보기)하고 있을 것이다. 많은 리스트들 중에서 무엇을 보면 좋을까를 내게 묻는 사람들에게, 유명한 드라마 하우스 오브 카드(House of Cards)가 목록에서 빠져있다고 투덜대는 사람들에게, 나는 마르코폴로(Marco Polo)를 권한다. 이번에 한국 서비스 목록을 보니 마르코 폴로의 등장인물 중 하나인 백안(百眼, 백 개의 눈, One Hundred Eyes)에 관한 못 보던 단편이 하나 더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