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동안 검찰은 지배 권력에 기생하며 살아왔다."
'미투 이후의 문학'은 어떻게 될 것인가
나는 이 일을 잘 나가던 여성시인의 철없는 해프닝으로 받아들일 수가 없다. 나는 이 일을 한국의 비혼 중년여성들의 형편없이 열악한 삶의 질의 문제로 받아들인다. 오죽하면 천하의 최영미가 근로장려금 수급사실을 밝히고 월셋방을 전전하는 게 끔찍해 자신을 호텔홍보요원으로 '판매할' 생각까지 했을까 싶다. 그것은 한 부황기 든 여성시인의 헛소리가 아니다. 내겐 그 소리가 지금 이 순간에도 헬조선의 최저점을 통과하고 있는 이 땅의 거의 모든 여성들이 타전하는 SOS 신호로 들린다.
다른 맥락은 제쳐두고라도 문학상이란 우선 수상하는 시인과 작가에게는 '명예'를 주는 일이다. 더욱이 그 문학상에 역사적 인물의 이름을 붙인다면 그 명예에 힘입어 더욱 영예로울 수 있다는 보편적 신뢰나 합의가 있어야 한다. 하지만 미당 서정주는 과연 그 이름으로 상을 줘도 좋을 만큼 보편적으로 명예로운가? 아무도 선뜻 그렇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런데도 그 이름으로 벌써 16회째 시상이 이루어졌고 황동규·정현종·최승호·김기택·문태준·김혜순·문인수·송찬호·김언·장석남·이영광·권혁웅·황병승·나희덕·최정례·김행숙 등 쟁쟁한 시인들이 역대 수상자로 이름을 올리고 있다.
"보수주의를 표방한 대통령이 좌파에 대한 지원 축소와 우파에 대한 지원 확대를 표방한 것 자체가 헌법이나 법령에 위배된다고 볼 수 없다" 저런 판결문을 마주하자니 사법정의에 대한 내 알량한 존중심이 갑자기 초라하게 느껴진다. 저 법언대로 하자면 게르만 순혈주의를 표방한 히틀러가 유대인에 대한 인권을 부정하고 반유대주의를 표방한 것도 통치자의 국정기조에 해당하므로 사법적 판단의 대상이 될 수 없게 된다. 통치자가 초헌법적 존재가 되고, 통치행위가 초헌법적 행위가 되는 순간이다. 처음엔 황당한 마음에 실소를 했지만 생각해 볼수록 두려워진다.
지금 노무현 정권 시기를 돌아보면 실패의 기억보다는 실패할 수밖에 없었던 상황 속에서 벌어졌던 그 사람(들)의 뜨거운 고투의 기억이 더 강렬하게 남는다. 나이가 들수록 과학적 전망이나 역사적 당위 같은 사람 바깥에서 안으로 이입되는 차가운 언어보다 분노, 슬픔, 공감, 회한 같은, 사람 안에서 끓어올라 밖으로 번지는 뜨거운 정념의 언어들이 더 가슴에 와 닿는다. 아마도 그것이 그날 내가 고민 끝에 5번이 아닌 1번을 찍게 된 진짜 이유일 것이다. 솔직히 말하면 문재인에게, 노무현의 친구인 그에게 한번 다시 해보라고 하고 싶었던 것이다. 나는 문재인이라는 바보같이 착하기만 해 보이는 사람의 속에 사실은 비수처럼 시퍼렇게 박혀 있으리라 짐작되는 그 깊고 뜨거운 정념과, 그 정념을 이기지 못해 어눌하고 더듬더듬한 발성으로밖에 나오지 못하는 그 낡고 변변치 못한 수사학이 지닌 가능성에 한 표를 기꺼이 던졌던 것이다.
세월호가 304명의 영혼을 맹골수도라는 레떼의 강에 부려놓고 3년 만에 누워서 돌아온 목포항구, 그 도시의 사람들은 봄꽃축제도 취소하고 "목포를 숭고한 인간애가 넘치는 사랑의 도시, 치유의 도시로 만들자"며 그 슬픈 귀환을 맞았다고 한다. 숭고한 인간애... 들어본 지 너무 오래되어서 차라리 낯선 말, 오래된 신화나 비극의 낡은 대사 같은 그 말, 한 개인이 말해도 어딘가 생광스러운 그 말을 남쪽의 작은 항구도시가 선언처럼 대놓고 꺼내놓았다. 우리가 잊어버린 지 너무나 오래된 그 말을.
이번 탄핵으로 우리네 삶에 장막같이 드리워져 있던 박정희의 그림자를 비로소 거두게 되었다는 말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 하지만 나는 그 말에 선뜻 동의할 수가 없다. 우리의 정신 어딘가 한 구석에는 그 딸의 집 문앞에 와서까지 무릎 꿇고 있는 저 여성의 형상이 여전히 도사리고 있다고 한다면 지나친 말일까? 태극기와 성조기를 흔들어대며 이 모처럼의 작은 승리의 국면을 대놓고 능멸하는 저 무도하기 짝이 없는 10%가 기대고 있는 근거가 사실 우리 자신들 속에 끈질기게 남아있는 바로 그 어두운 형상이라고 한다면?
대선에 임박해서 민주당의 후보군 중의 한 명인 그가 이명박, 박근혜를 예로 들어 '선한 의지'를 말하는 것은 이러한 자신만의 대화방식 일반을 말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문제이다. 우선, 그가 다른 자리에서 변명한 대로 그것이 '조롱'의 뉘앙스를 가진 말이라면, 전통적 민주당 지지자들에게는 위안이 되겠지만 손석희 앞에서 밝힌바 상대방의 진정성을 일단 인정하고 들어간다는 자기만의 대화술의 원칙에는 어긋나는 것이 된다. 조롱이나 비아냥은 일단 상대방의 선의를 긍정하고 들어가기는커녕 처음부터 상대방에게 모욕을 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둘째로 '조롱'의 뉘앙스가 없는 채로 이명박근혜의 진정성을 인정하고 들어가는 것이었다면 그것은 대선국면에서 보수층을 견인하려는 철저히 계산된 진술이라고밖에 할 수 없다.
바라던 대로 김기춘이 구속되었다. 그의 구속 소식을 접한 순간 가장 먼저 떠오른 얼굴이 있었다. 강기훈씨였다. 1991년 이른바 '유서 대필 사건'으로 3년의 징역을 살았던 그 사람. 분신자살한 친구 김기설의 유서를 대필해 줬다는, 다시 말하면 유서를 대필하면서까지 친구의 분신자살을 교사 내지 방조했다는 혐의를 뒤집어썼던 사람. 감옥에 있던 시간은 3년이지만 재심 끝에 2015년에 대법원에서 무죄가 확정되기까지 무려 24년 동안을 보이지 않는 감옥 속에서 살아야 했던 사람. 이제는 침묵 속에서 간암이라는 병마와 싸우고 있는 사람. 당시 법무부장관이 김기춘이었다.
이 '소녀상'이 어쩔 수 없이 환기시키는 '능욕당한 순결한 소녀'라는 이미지는 전쟁범죄자들의 죄상을 묻는 일에 적합한 상징성만을 띠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데 문제가 있다. 이 이미지는 흔히 식민지 침탈을 당하거나 패전을 당하거나 하는 특정 민족(국가)의 불행한 상태를 환유하여 '민족주의'라는 비이성적 환상을 조작해 내는 데에도 적합한 상징성을 갖는다. 더 나아가면 여성에 대한 고착된 관념 - 연약하고 보호받아야 하고 순결해야 하고, 다른 '놈들'이 건드려서는 안되는, 비자율적이고 수동적인 존재라는 남근주의적 관념을 재생산하는 또 다른 상징성도 가지고 있다. 이 점이 바로 나도 공감하는 바 이 '소녀상'이 주는 불편한 느낌의 근거일 것이다.
'여성혐오'의 원어인 misoginy는 여성을 싫어한다거나 증오한다거나 하는 뜻이 아니라 "남성지배를 용이하게 하기 위한 모든 전략"이라고 보는 것이 더 원래의 의미에 가깝다. 그럴 경우 문자 그대로의 '여성혐오'만이 아니라, 여성 보호, 여성 존중, 여성 애착 등 겉보기에는 매우 여성친화적으로 보이는 태도들 역시 차별적인 젠더역할을 고정화시켜 남성지배의 구조를 영속화시킨다는 점에서 분명 '미소지니'이고, 황수현 기자는 이런 맥락에서 류근 시인의 시들 역시 '여성혐오'의 반열에 위치지은 것이다. 이것은 매우 논쟁적인 문제이기는 하지만, 오늘날의 페미니즘에서는 또한 매우 상식적인 견해이기도 하다.
오늘날 타자화되어 고통받고 있는 존재들에 대한 공감, 혹은 공감하려는 노력이 없는 자들이 '진보'의 이름을 참칭하는 사례가 너무나 많다. 박근혜를 욕한다고 진보가 아니다. 미국을 욕하고 친일파를 비난하는 게 진보가 아니다. 아마도 자기들이 '진보'라고 하면서 이 세계의 대표적인 타자화된 존재들인 여성들을 다양한 방식으로 혐오(재타자화)하는 데 힘을 쏟고 있는 자들이 아마도 대부분 바로 '진보'를 참칭하는 민족주의자, 국가주의자들(잠재적 파시스트들)은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든다.
지배언어체계를 전복하는 것은 피지배자의 해방에 있어서 결정적으로 중요한 일이다. 하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언어 수행이 가지는 다층적이고 맥락적인 측면에 대한 매우 섬세한 고려가 따라야 한다는 게 나의 생각이다. 남성들의 언어가 가해자의 언어이고, 여성들의 언어가 피해자의 언어라면 여성들의 언어는 길게 볼 때 해방적이되 가해적이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전복적이되 본질적으로 폭력적이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것이 피지배자의 언어가 지배자의 언어체계를 전복시키고 새로운 해방의 언어로 발돋움할 수 있는 제일의 조건이라고 나는 믿는다.
당연히 메갈리아가 대상으로 하는 것은 일베만에 국한되지 않는다. 메갈리아는 직접적으로는 미러링을 통해 일베의 언어와 행태를 전도시키지만, 그것을 통해 전도되는 것은 일베들의 '특수한' 문화나 언행만이 아니라 한국남성의 여성에 대한 '일반적' 태도와 인식이다. 메갈리아는 한국남성들이 여성들을 차별하고 착취하기 위해 또는 그 과정에서 젠더적으로 공유해 온 언어세계를 과감하게 침범하고 그것을 탈영토화하여 백일하에 드러냄으로써 그 언어세계가, 그리고 그것의 배경에 완강하게 자리잡아온 차별과 착취의 심상과 제도, 습속 전체가 얼마나 낯설고 외설적이며 반윤리적이고 폭력적인 것인지 문득 깨닫게 해 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