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주의와 복지 선진국이 ‘조용한’ 승리자가 될 것이다.
문재인 정부는 '엉망진창 자본주의'에서 벗어나야 한다
공자님은 마구간에 불이 난 것을 보고 "사람은 상하지 않았나?"라고 물었다. 공자님이 말에 대해 묻지 않은 이유는 말을 귀중하게 생각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사람을 제일 중하게 생각했기 때문이다. 흑인 노예를 죽여도 문제가 되지 않던 시절 미국 링컨 대통령은 "노동은 자본에 우선하며, 자본은 노동의 과실일 따름이다.
작년 가을 50년 만에 고향에 다녀왔다. 아흔 중반을 바라보는 어머니가 고향 선산으로 가실 마음을 정하지 않았다면 아직도 안 갔을지 모른다. 한국전쟁이 끝난 지 15년쯤 지난 뒤 할아버지 산소를 고향 선산에 썼다. 그 침묵에 가득 찬 묘비 제막식을 마지막으로 나는 고향에도 선산에도 발을 딛지 않았다.
시험은 정규직들이 주장한 것처럼, '흙수저'들이 수용할 수 있는 정당성과 객관성의 마지노선이었다. 그러나 시험이 과연 최선의 방법일까? 과정의 '객관성'이 이후의 모든 성과를 보장할까? 사실 시험은 모든 사람에게 공정한 기회를 주지는 않는다.
자산격차나 소득격차에서 한국은 미국 다음의 세계 최대 불평등 국가가 되었다. 한국은 상위 10%가 소득의 47%를 가진 나라, 상위 1%가 전국 토지의 반을 차지한 나라가 되었다. 비정규직 고용의 일반화, 청년실업, 30~40대 대도시 거주자의 주거 빈곤의 상당 부분은 모두 우리가 국제통화기금(IMF)이 요구한 사항을 따른 결과였다. 게다가 한국은 청소년의 반이 부모의 능력이 자신의 미래를 좌우한다고 생각하는 신세습사회가 되었다.
국외자가 보면 사실 미국이나 북한보다도 역대 한국 정부가 더 이상할 것 같다. 북한의 거의 40배 이상의 국방비를 지출하고도 자주국방을 하지 못해서 미국의 바짓가랑이를 잡아온 한국의 군부 권력층이나, 동족상잔의 전쟁으로 인구의 10%를 잃었으면서도 또 다른 전쟁 위기 앞에서 북한의 불장난을 자제시키고 트럼프의 막말 행진을 견제할 반전 시위 하나 못하니 말이다. 북한과는 아예 비교할 수도 없는 국제적 입지를 갖고 있는 촛불의 동력까지 얻고서도 현 정부는 이런 상황에서 개입할 여지가 없다고 스스로 위축된 모습을 보이니 말이다.
한국에서는 학술행사나 각종 토론회, 그리고 시민사회의 모임에 가면 50대 중·후반 사람들이 거의 단상에 앉아 있거나 마이크를 쥔 경우가 많고, 청중도 대부분 이 또래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거의 모든 학회, 시민모임, 노조에 젊은 사람들이 오지 않는다는 이야기가 나온 지도 한참 되었다. 늙어가는 한국? 베이비붐 세대의 장기집권? 청년들 무시하는 위계서열 조직 문화? 그런 점도 있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봐도 3, 40대가 오지 않는 것이 아니라 이런 모임에 올 3, 40대 자체가 없다는 생각이 든다.
한국은 가족책임, 가족투자 국가다. 국가나 사회에 대한 낮은 신뢰 수준과 공공서비스의 부족이 가족주의를 강화해왔다. 큰 부자들이 반칙으로 돈을 벌어도 세금도 잘 내지 않고 사회적 책임도 지지 않기 때문에, 작은 부자들도 재산을 무조건 자식에게 물려주려 한다. 국가의 공공 인프라 확대로 거저 얻은 부동산 재산이 자녀들에게 편법으로 상속되는 것이 가장 정의롭지 않은 일이다. 재벌, 언론, 사학, 대형교회 등 사실상 공공적 성격을 가진 기관이 한 가족에게 독점, 상속되는 행태는 한국 사회의 천박한 수준을 말해준다.
이언주 국민의당 의원은 "밥하는 아줌마가 왜 정규직이 되어야 하는 거냐?"고 말해서 큰 파문을 일으켰다. 단순노동을 비하하는 그의 평소 생각이 드러난 것이지만, 비정규직의 정규직화 움직임에 부담을 느낀 기업 쪽의 거부감을 집약한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며칠 전 중소기업과 소상공인들은 내년도 최저임금 인상안에 반대하면서 최저임금위원회 참여를 거부했다. 한편 얼마 전 문재인 정부의 자사고 폐지 정책에 반대해서 자사고 학부모들은 "국가 경쟁력 강화를 위해서는 인재육성이 필요하다"며 자사고 폐지 반대 시위를 했다. 문재인 정부의 비정규직 보호, 교육 공공성 강화 정책에 대한 이해 관련자들의 반발이 점차 행동으로 나타나고 있다.
미국 내 유학생 수에서 한국 학생은 전체 3위이지만, 인구 대비로 보면 압도적 1위다. 세계 모든 나라가 미국 학술시장의 영향권 아래 있는 것은 사실이나, 수십년째 교수나 박사 연구자를 미국 대학에서 공급받는 나라는 한국뿐이다. 서울의 상위권 대학 사회과학 분야에서 미국 박사의 비율은 80% 이상이며, 경제학 교수의 95% 이상이 미국 박사다. 타계한 미국 매사추세츠공대(MIT) 경제학자 암스덴은 한국만큼 재벌 대기업 문제가 중요한 나라가 없는데, 한국에 대기업 연구자가 드문 것은 정말 이해할 수 없다고 질타한 적이 있다. 다른 중요 분야도 마찬가지다. 미국의 대학원은 한국 학생들에게 그런 것을 가르쳐줄 리 없기 때문일 것이다.
노무현 대통령은 자신을 새 시대의 첫째가 되고 싶었으나 구시대의 막내가 될 수밖에 없었다고 한탄했다. 그렇다면 '구시대'는 노무현 정권이 마무리했는가? 실제 노무현 정권의 뒤를 이은 이명박·박근혜 정권은 구시대를 더 심각하게 연장시켰다. 그래서 노무현의 임무는 다시 문재인 정권으로 넘어왔지만, 10년이 지난 지금 '구시대'와 '새 시대'의 내용이 약간 변했고, 문재인 정권은 더 이상 구시대의 막내 역할에 머무를 수 없게 되었다.
이들 거대 이익집단의 목표는 명확하다. 교육, 주택, 의료 부문을 "가급적 시장에 맡기자"는 논리를 동원하여 먹거리를 확보하는 것이다. 이미 외환위기 이후 지난 20년 동안 우리 사회의 많은 공공부문이 민영화되거나, 공공부문 확대가 계속 저지되어 서민들의 부담은 늘어날 대로 늘어난 상태다. 지금 대선 국면의 모든 후보는 자신이 국민의 편이며, 자신이 집권하면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말한다. 그들의 뜻과 의지를 믿고 싶다. 그러나 우리는 '조직되지 않은' 국민은 조직된 이익집단을 당할 수 없다는 냉엄한 현실 위에 또다시 섰다.
지난 20년 동안 정치는 시소처럼 오르내렸는지 모르나, 교육 노동 인권 영역은 거의 변하지 않았거나 오히려 더 나빠졌다. 즉 김대중 노무현 정부에서 조금 좋아졌다가 그 후 9년 동안 나빠진 것이 아니다. 외환위기 직후에는 실직한 가장들이 자살하는 일은 많아도 지금처럼 콜센터 실습 중인 학생이 자살하거나, 구의역에서 일하던 19살 청년 노동자가 전동차에 끼여 죽는 일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