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미애 법무부 장관 인터뷰
현재 조건은 1965년 '한일협정'에 기초하고 있다.
촛불혁명의 구호가 "박근혜 퇴진!"이었다면, 1년이 지난 지금 우리의 구호는 "민주주의를 감행하자"가 돼야 한다. 학교에서, 일터에서 어디까지 민주주의를 할 수 있는지 실험해보자. 삶의 현장을 민주주의가 실현되는 공간으로 바꿔보자. 우리가 얼마나 성숙한 민주주의자인지, 우리 사회가 얼마나 성숙한 민주사회인지 점검해보자.
이쯤 되니 한국 수구의 '안보 장사'에 어지간히 면역이 된 내게도 불안한 마음이 고개를 들었다. 한국 상황을 알아보기 위해 오랜만에 포털에 들어갔다. 그런데 어인 일인가. 거기엔 북한 핵도, 김정은과 트럼프의 막말도, 전쟁 위기도 없었다. 실시간 검색어 1위는 "류현진 등판 일정"이었고, 어떤 여배우의 셋째 임신 소식이 검색어 2위에 걸려 있었다. 검색어 10위 안에 북핵이나 한반도 위기 관련 보도는 없었다.
100미터 남짓한 이 아담한 거리에 유태인을 추모하는 황동판이 무려 36개나 심어져 있는 것을 보고 경악했다. 이 아름답고 평온한 거리가 아우슈비츠와 연결돼 있다는 사실이 비현실적으로 여겨졌다. 일상에 불현듯 틈입한 역사에 아득한 현기증을 느꼈다. 매일 집 앞에서 아우슈비츠를 만나야 하는 독일인의 심정이 궁금해 한 중년 여성에게 걸림돌이 주는 심리적 부담감에 대해 물었다. 돌아온 답은 뜻밖이었다. "마땅히 짊어져야 할 부담입니다. 우리는 지금 과거와 만나는 새로운 방법을 배우고 있습니다."
한국에서 대학은 미래의 유토피아를 선취하는 공간은커녕 가장 후진적이고 시대착오적인 사회기구로 전락하고 말았다. 초등학교 반장도 선거로 뽑는 시대에 지성인을 자처하는 구성원들이 자신의 대표를 스스로 선택하지 못하는 비민주적인 조직이 한국 대학이고, 비정규직에 대한 차별과 착취가 가장 자심하게 자행되는 곳이 한국 대학이며, 자본과 국가 권력에 굴종하며 일체의 비판정신과 변혁의식을 거세당한 곳이 한국 대학이다. 대학이 이처럼 남루한 흉물로 퇴락한 결과 한국 사회는 비판의 정신도, 정의의 언어도, 변혁의 전망도 상실한 절망사회로 추락했다.
학계 블랙리스트의 가장 파괴적인 해악은 학자의 자기검열을 부추긴다는 것이다. 학자의 자기검열은 독재자의 사상검열보다 더 무섭다. 독재정권의 물리적 검열은 대중의 분노라도 사지만, 학자의 심리적 검열은 무색무취한 독가스같이 부지불식간에 학자의 의식을 마비시킨다. 문화계 블랙리스트가 예술가의 영혼을 좀먹는다면, 학계 블랙리스트는 학자의 정신을 썩어들게 한다. 이런 의미에서 블랙리스트는 그 자체가 인간 정신에 대한 범죄다.
문재인 정부는 '3기 민주정부'나 '2기 노무현 정부'가 아니라, 시민혁명이 잉태한 '1기 혁명정부'라는 자의식을 가져야 한다. 지난 70년간 이 나라를 '기형국가'로 불구화한 강고한 기득권 체제를 혁파하는 것, 새로운 '정책'을 넘어 새로운 '체제'를 창출하는 것, 한국 사회의 패러다임을 바꾸는 전환시대의 선봉장이 되는 것- 이것이 문재인 정부에 부여된 시대적 과제다. 독일 현대사가 브란트 정부 이전과 이후로 나뉘듯, 문재인 정부도 한국 현대사의 역사적 분수령이 되길 기대한다.
대선 후보 티브이토론을 보면서 모멸감을 떨칠 수 없었다. 1600만 촛불의 기억이 벌써 사라진 것인가. '시민혁명' 직후의 선거가 어찌 이럴 수 있는가. 토론 내내 '박근혜 사태'에 책임이 있는 구여권 후보들이 오히려 공세를 펼쳤고, 구야권 후보들은 수세에 몰렸다. 조기 대선의 원인이 된 박근혜 정권의 부패와 무능, 민주주의의 후퇴, 남북관계의 파탄, 외교의 총체적 실패 등은 언급조차 되지 않았다. 가히 정치적 정신분열, 적반하장의 상황이다. '색깔론'이 창궐하는 선거전과 최근의 위태로운 한반도 정세를 보며, 한국 민주주의의 '주적'은 바로 냉전체제라는 사실을 절감한다. 그 이유는 네 가지이다.
'민주주의의 최대 적이 약한 자아'라면, 한국 교육이야말로 민주주의의 최대 적이다. 학생의 자아를 철저히 약화시키는 주범이기 때문이다. 아무리 자아가 강한 아이도 한국의 학교체제에 발을 딛는 순간 온전한 자아를 보존하기 어렵다. 학교는 학생들을 '존엄한 인간'으로 존중하지 않고 점수로 줄 세워 우열의 질서 속에 배치한다. 그럼으로써 한쪽에는 일상적인 모욕과 무시 속에서 열등감과 좌절감을 내면화한 '열등생'을 만들어내고, 다른 쪽에선 턱없는 우월감과 오만한 심성을 가진 '우등생'을 길러낸다. 이들은 모두 자아를 파괴하는 거대한 폭력기구의 희생자들이다.
사실과 진실의 권위가 무너진 폐허에서 선동가들의 거짓말이 번져가고 있다. 그들의 거짓말이 위험한 진짜 이유는 그들이 거짓을 사실로 믿게 하기 때문이 아니라, 명백한 '사실'을 하나의 '의견'으로 강등시키기 때문이다. 그들은 이렇게 사실의 신뢰성을 잠식하고 공론장을 왜곡하여, 결국 민주주의의 토대를 허문다. 민주주의는 다양한 의견 사이의 논쟁에 근거하고, 의견의 타당성은 사실에 기초하기 때문에, 사실이 무너지면 의견이 무너지고 결국 민주주의가 무너지는 것이다.
순항할 것으로 보이던 '18살 투표권' 입법이 암초에 걸려 좌초될 위기에 처해 있다. 문제는 '바른정당'의 기회주의적 처신이다. 선거 연령 18살 하향 조정을 '개혁입법 1호'로 내세우더니 '만 18살은 선거에 참여하기에 미숙한 존재'라는 이유를 들어 돌연 반대 입장으로 돌아섰다. 특히 권성동 의원은 고등학교 3학년에 해당하는 18살은 "독자적 판단 능력이 부족"하다며, "고3을 무슨 선거판에 끌어들이느냐. 공부 열심히 해야지"라고 말했다고 한다. '합리적 보수'를 자처하는 유승민 의원마저 같은 이유로 반대 입장을 표명했다는 보도다. 이들은 한목소리로 '고등학생에게는 선거권을 줄 수 없다'는 논리를 펼치는 것이다
1000만 촛불의 기적은 한국 민주주의의 엄청난 잠재력을 보여주었지만, 동시에 '광장민주주의'가 아직 '현장민주주의'에 도달하지 못한 현실을 처연하게 돌아보게 한다. 우리는 '광장'에서 위대한 민주주의 혁명을 이루었지만, 정작 실제 삶이 영위되는 '현장'에서는 지극히 비민주적인 일상을 살아가고 있다. 가정에서, 학교에서, 일터에서 우리는 과연 얼마나 '민주주의자'로 살아가고 있으며, 얼마나 민주적인 제도와 문화가 실행되고 있는가. 광장에서 당당하게 대통령을 비판하듯이, 삶의 현장에서 교장, 총장, 사장을 공개적으로 비판할 수 있는가. 광장민주주의와 현장민주주의는 여전히 비대칭적으로 괴리되어 있다.
200만 촛불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촛불이 요구하는 것은 단지 박근혜 대통령의 탄핵만이 아니다. 그것은 동시에 대통령의 종복으로 권력에 기생해온 새누리당, 국민들을 무한히 착취해온 재벌, 정권의 시녀로 전락한 검찰, 권력의 나팔수로 타락한 언론에 대한 탄핵이고, 대통령의 부패와 전횡을 견제하지 못한 무능한 야당에 대한 질책이다. 촛불은 또한 인간다운 삶을 살고 싶다는 절규이며, 더 이상 굴종의 삶을 살지 않겠다는 결의이다. 요컨대 촛불은 부패하고 파렴치한 '구체제' 전체에 대한 탄핵이고, '새로운 나라'에서 '다른 삶'을 살고 싶다는 절규이며, 더 이상 타락한 기득권 집단의 노예로 살지 않겠다는 결의이다.
최순실의 파렴치한 행각은 분명 엽기적이다. 그러나 더 놀라운 것은 지난 4년 동안 청와대는 말할 것도 없고, 정부, 여당, 대기업은 물론 학교와 대학에서도 그의 불법-탈법-초법적 행태가 '아무런 저항 없이' 관철되었다는 사실이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는가? 대통령의 '말씀'을 받아쓰기에 여념이 없는 장관들, 대통령의 수족에 불과한 청와대 인사들, 대통령의 '상머슴'을 우두머리로 모시고 있는 여당 정치인들, 권력자의 한마디에 즉각 수십억원을 갖다 바치는 재벌들, 부당한 압력에 무릎 꿇고 이득을 취하는 교수들-이들의 행태는 주인 앞에서 설설 기는 노예의 모습 그 자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