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갑자기 배우자가 세상을 뜬다면
이제 서울 사는 게이나 레즈비언들은 혼자 살든 둘이 살든 절대 청약 당첨이 될 수가 없겠구나 싶었다. 이전엔 일정 비율에 대해서는 가점 상관없이 무조건 추첨이었기에 그거 하나 바라고 청약을 넣었던 건데, 8월부턴 무조건 가점제가 되었다. 법적인 결혼을 할 수 없는 우리 동성애자들 같은 경우에는 결혼을 한 이성애자 부부들과의 가점 경쟁에서 상대가 될 수가 없다.
'베이비 드라이버'는 결코 자동차가 중요한 영화가 아니다. 십 수년은 회자될 만한 오프닝 자동차 도주 시퀀스의 자동차는 흔하디 흔한 스바루다. 수억 원짜리 슈파카를 장난감 자동차마냥 찌그러트려 버리는 많은 블록버스터 영화들과 다르다. 그런 영화들에서는 자동차 그 자체가 주인공이고 속도 그 자체가 주제이지만, 이 영화는 처음부터 끝까지 오로지 엄마에 대한 영화이다. 이 영화가 보여주는 드라이빙은 다른 어떤 영화들에 못지 않는 볼거리이기도 하지만, 이 영화 안에서는 와이퍼 소리로, 경적 소리로, 급회전하는 타이어 소리로, 차체를 두들기는 소리로, 오로지 음악의 부분들로 작용할 뿐이다.
한 번은 크리스마스 이브였다. 형이 워낙 좋아하는 밴드가 크리스마스를 맞아 콘서트를 열었었는데, 형 몰래 티켓을 예매해 깜짝 선물한 적이 있다. 1부 무대가 끝나고 밴드가 옷을 갈아 입는 동안 빈 무대를 대신 채워줄 초대 가수가 나왔는데, 시간을 더 때워야 했는지 관객들을 대상으로 말을 걸다 우리를 발견하고선, 아, 여기 또 불쌍한 분들이 계시네요, 이런 날 남자 둘이 콘서트장까지 오시고, 이 불쌍한 두 남성분께 위로의 박수 부탁 드립니다, 라고 말하며 친히 우리를 손가락으로 콕 콕 찍어 주었다. 당연히 그 조롱의 대상은 게이 커플이 아니라 솔로인 두 이성애자 남자였겠지만, 그래서 더 슬프고도 분한 2부 공연이었다.
기억할지 모르겠다. 술을 못하는 내가 너랑 단둘이 처음 술 마셨던 밤. 그날도 술 마시면서 난 너에게 '왜 연애 안 하느냐'고 어리석게 질문했고, 넌 웃어넘겼지. 술집을 나와서 택시를 잡기 위해 걸어가던 구청 근처에서 너는 그제야 정말 차분하게 네가 게이라고 내게 말해줬어. "헉!" 정말 크게 내뱉은 내 첫마디였지. 내 목소리가 너의 차분함과 대조적으로 밤공기를 갈라버려서, 내 첫 반응이 혹시 너한테 상처가 됐을까 봐 그날 너랑 헤어지고 집에 와서 두고두고 미안했어.
사실 난 하는 꼴만 봐선 꼴등 남편이다. 결혼 3주년 기념일이 다가오지만, 결혼한 후 뿐만 아니라 같이 산 6년 가까운 시간 동안 크게 다르지 않았다. 평일 저녁 쓰레기 분리수거도 거의 매주 형이 혼자 하게 되고, 술에 정신을 잃고 새벽에 들어온 날이면 내 옷을 갈아 입히고 침대에 눕히는 것도 형이다. 그런 형에 비하면 난 정말 빵점짜리 남편이다. 내가 형에게 남편 노릇을 잘 못해줘서 미안한 건 단순히 집안일을 형이 더 많이 감당하기 때문만은 아니다. 물론 그게 부부 생활에 얼마나 큰 부분인지는 누군가와 동거를 해본 사람들은 다 알겠지만, 그것보다도 더 형에게 미안한 부분이 있다.
모두들처럼, 게이들도 참 전형적인 제 몫의 스트레스를 가지고 있다. 특히 내 나이 또래나 나보다 조금 더 형님인 게이들이라면 넌 여자친구 안 사귀냐? 형은 여자친구 안 사귀어? 오빠는 여자친구 안 사귀어요? 라는 식으로 거의 모든 친척들에게 집중포화를 맞기 십상이다. 실제로 주변에 보면 이런 오지랖을 피해 일부러 고향에 안 내려가는 게이들도 참 많다. 한국에서 태어난 게이 주제에 양가의 축복을 받고 결혼식을 올린 우리는 가족들에게 이런 말을 들을 일이 없긴 하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고 쳐도, 일가 친척이 모인 남편의 큰집에 함께 찾아가 차례상에 절을 할 수는 없는 게 현실이다.
잠깐 보는 사이에 형이 내가 참 좋아하는 인상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보통 사진만 본 후의 첫만남에서 진짜 괜찮은 사람이 나오는 건 (일반들의 소개팅에서도 비슷하겠지만) 열에 하나 정도 되려나. 그런데 그 사람이 날 마음에 들어 할 확률도 열에 하나일 테니, 둘의 쿵짝이 잘 맞으려면 100번은 사람을 만나봐야 한다는 게 그때나 지금이나 내 생각이다. 아마 형을 만난 그때가 내 100번째 차례였나 보다.
한 달 전부터 이사 갈 집을 찾아 다녔다. 부부는 일심동체라고 형도 같은 생각이어서, 틈이 날 때마다 밖에 나가 이 동네 저 동네 부동산을 부부구경단처럼 들쑤시고 다녔다. 물론 다닐 때마다 저희는 일심동체이다 못해 일심동성까지 된 부부입니다, 라고 하지는 못하고, 방을 나눠 쓸 선후배 사이라고 설명을 해야 했다. 하지만 이 되도 않는 거짓말을 누가 믿었을까 싶기도 하다. 형은 날 쳐다만 봐도 눈에서 파블로프의 하트가 뿅뿅 나오는데.
아무리 우리가 소비에 죄책감이 조금 모자란 부부라 해도, 애 없이 차도 없이 둘이 버는 우리 집조차 이렇게 전세금 걱정에 부들부들 해야 하는 꼴이라면, 외벌이에 차 몰면서 아이들까지 키우는 집들은 참 말이 아닐 것 같다. 오, 리스펙트가 절로 나오네. 양 집안의 도움 없이 결혼해 살림을 하고 있는 거긴 하지만 요즘 같은 세상에 이런 부부가 우리뿐만은 아닐 테고, 그나마 반월세 살다가 이번 집부터 빚을 얻어 전세 들어온 처지인데 원금을 갚기는커녕 전셋값 올려줄 생각만으로도 살림이 벅차니, 이것 참 집 없는 설움에 눈물이 벅차네.
회사 일이 삶의 전부인 부장님들 팀장님들, 임원이 된 선배들이 보기에 이런 내 삶의 관(觀)은 남자답지 못한 걸로 보일 수도, 비전이 없는 걸로 보일 수도 있겠다. 누군가는 나를 참 사소하게 사는 사람이라고 하겠지. 하지만 나는 사소하게 살고 싶다. 내 몫이 아닌 욕망을 가지지 않는다는 이유로 죄책감을 가지기 싫다. 청운의 꿈도 없고 부귀영화도 필요 없다. 회사에서 받는 월급만큼 회사에 기여를 하고, 그렇게 번 돈으로 사소한 소비와 사소한 여가의 행복을 즐기며 살고 싶다. 출근은 하지만 출근하기를 계속 싫어하면서, 회사에 없는 시간에 무엇을 해야 행복할지 계속 고민하면서, 오순도순 내 깜냥대로 과장이나 거짓 없이.
이것은 단순히 서울의 한복판 밝은 거리에 남자끼리 손 잡고 걸을 수 있는 자유의 만끽 수준이 아니었다. 지나가는 버스에서, 주변 건물에서, 길거리에서 우리의 행진을 보며 손을 흔들어주는 많은 사람들을 보며, 우리도 더 반갑게 손을 흔들고 큰 소리로 환호했다. 우리 스스로를 인정하고 거리로 나서자 우리를 인정하고 반겨주는 사람들을 만났다. 시청부터 명동까지 거대한 무지개 띠를 만들며 걷는 건 한 시간 정도밖에 걸리지 않았다. 이 한 시간을 위해 짧게는 몇 달 동안 혐오 세력에 맞서 싸울 힘이 필요했고, 길게는 지난 열다섯 번의 축제가 필요했다. 하지만 단언컨대 이 한 시간은 지금까지의 대한민국 성소수자 인권 운동의 역사에서 가장 힘차고 아름다운 한 시간이었을 것이다.
어쩌다 나오게 된 방송 "SBS스페셜, 우리 결혼했어요"에서 블러 처리된 나와 남편의 얼굴을 보니, 글을 쓸 때 느꼈던 이 김게이라는 이름의 가면성이 너무 직접적으로, 시각적으로 느껴져 뭔가 유난스러운 오늘이다. 언젠가 나도 가면 위의 가면을 벗고, 비로소 내 모든 가면을 벗어 자유로워질 날이 오길 바란다. 대부분의 회사원 게이가 그렇듯, 어쩌다 술자리 이야기로 게이 연예인 이야기라도 나오면 더럽네 죽여버리고 싶네 하는 소리를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이런 조직에서 밥벌이를 해야 하는 신세 탓에 아직 가면을 벗을 자신이 없다. 하지만 언젠가 내가 맺을 관계를 내가 선택할 수 있게 되는 날, 그 냄새 나는 편협함을 굳이 견디지 않아도 되는 날, 그날 족쇄를 끊듯 가면을 벗고 노래를 해야지. 덩실덩실 춤을 춰야지. 간절히 원하면, 우주가 도와주지 않겠는가.
입소하기 전 굳이 우리 집 주소를 물어 가더니, 누가 게이 아니랄까봐 전투화 뒤꿈치에 주름이 잡히기도 전에 편지를 써 보냈다. 4주 훈련 받으면서 애인도 아니고 부모님도 아니고, 나한테까지 이렇게 손편지를 써서 보내다니... 이렇게 게이게이한 동생에게 또 이름부터 게이인 내가 어찌 답장을 써주지 않을 수가 있나. 회사 근처 문구점에 가서 편지지 사와 가지고, 바로 쓰면 수정을 못하니 아웃룩에 업무 메일 쓰는 척 초안까지 써가지고, 피씨로 쓴 걸 또 손으로 옮겨 써 장장 세 장에 걸친 위문 편지를 보내줬다. 뭐, 게이끼리 주고 받는 위문편지라 해서 별다른 건 없다. 뭐 대충 이런 편지랄까...
여자 남자가 결혼해도 시댁 처갓댁 때문에 골머리를 앓고 파혼 이혼도 한다는데, 난 한국에 태어난 게이 주제에 무슨 복을 타고 나서 이렇게 좋은 가족들을 만났는지 모르겠다. 지난주 시골에 내려가기 전, 커밍아웃을 한 대학생이 가족에게 끝내 이해 받지 못하고 한강에서 투신 자살을 했다는 기사를 읽었었는데, 내가 누리는 이 행복이 온전히 내 운이 좋아서라는 생각에 한없이 감사하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괜스레 마음이 무겁기도 하다. 내가 천의 하나로 복 받은 게이라면, 이 복 많은 게이가 차츰 백의 하나, 열의 하나가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20대 초반 한창 연애에 목말라 있을 때에는 뜬금 없이 램프의 요정에게라도 빌고 싶은 소원이 한 가지 있었다. 팔 다리 굵고 등이 운동장처럼 넓은 램프의 요정 지니가 나타나 김게이야 김게이야, 그 동안 게이로 살기 난이도 나이트메어 급인 한국 사회에서 음으로 양으로 호모 포비아들의 핍박을 받으면서도 씩씩하게 잘 살아왔으니 내가 업적 보상으로 네 소원 하나 들어줄게, 원하는 게 뭐니? 라고 묻는다면 이 초능력을 달라고 꼭 말하고 싶었다.
형과 함께 병원에 찾아가 첫 조카를 처음 봤을 때부터 했던 생각이 있다. 내 조카들이 학교에서 친구들에게 "우리 삼촌은 게이야" 라고 별 일 아닌 듯 말하고 다닐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선생님이 남자와 여자가 서로 사랑해서 부부가 되는 게 결혼이라고 가르쳐 줄 때, 남자와 남자도, 여자와 여자도 결혼할 수 있다고 손들고 말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더불어 다양성을 존중하는 마음과 사회적 소수자에 대한 인권 감수성을 풍부히 가지게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5년 전에는 그저 막연하게 그런 생각을 했던 건데, 이제 막상 3년만 더 있으면 첫 조카가 초등학교에 입학할 거라고 생각하니 참 삼촌으로서 내 마음이 복잡하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