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공영방송의 이사다.
인간의 일생과 마찬가지로 한 국가의 지나간 운명은 되 돌이킬 수 없다. 자력근대화를 할 수 있었으나 일제가 불공정한 방법으로 기회를 빼앗은 것이라는 가설은 '만약'이라는 상상으로만 가능하다. '긍정적 역사창출'이라는 명분으로 자의적 해석된 민족적 자아도취만으로 암울한 국제정세를 헤쳐 나갈 수 있을지 의문이다.
홍준표 후보가 문재인 후보보다 두 배 이상 득표했다는 대구경북 지역 출구조사결과가 공개될 때, 60대 이상에서 홍준표 후보가 제1의 지지율을 기록했다는 보도가 나올 때 이 '대구경북노인들'은 한국을 아직 전근대의 영역에 붙들어놓는 망국의 근원으로 지목당한다. 2000년대 후반이 "20대 개새끼론"을 비롯해 "정치에 관심없는" "나약하고 무력한" 청년세대들을 '나라를 망치는 주범'으로 확정짓는 시기였다면, 놀랍게도 그로부터 채 10년이 지나기 전에 화살이 정반대 방향을 향하고 있다. 물론 이러한 변화는 단순히 우파정권의 변명불가능한 실책만의 소산이 아니며, 그동안 한국인들이 정치체의 핵심으로 간주해오던 가치 자체가 이동했음을 함축한다.
동아시아에서 가장 먼저 근대화되고 서구 근대문명을 동아시아 문어로 번역함으로써, 동아시아 근대문명의 저작권을 선취한 일본이 동아시아 근대성의 기준이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확실히 '일본 표준(Japanese Standard)'이 존재한다. 그렇다면 동아시아의 근대화는 결국 일본 표준에의 거리에 따라서 결정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동아시아 근대 갈등의 가장 극적인 장면은 먼저 근대화된 일본이 제국주의가 되어 다른 지역을 침략하는 과정에서 발생하였다. 대만, 조선, 중국에서 그러한 일이 일어났다. 확실히 동아시아 근대 갈등의 주된 장면을 연출한 것은 일본의 침략이었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일본의 영향, 즉 '일본 표준'을 어떻게 수용하고 내재화하는가의 차이가 갈등을 만들어낸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정치적 반동은 '좋았던 시절'에 대한 향수를 불러일으킵니다. 국정교과서라는 시대착오적 시도로 인해 김대중-노무현 정부로 돌아가는 게 진보라는 착시현상이 일어납니다. 정치 의제에서는 김대중-노무현 정부 시절로 돌아가는 게 맞을 수도 있습니다. 일시적으로 민주/반민주 대립 구도가 재연되고 있으니까요. 그러나 경제나 사회 의제에서 현상유지나 복고는 곧 퇴보입니다. 결국 국정교과서 논란은 새삼 범진보세력 전체의 위기를 우회적으로 드러냅니다. 지향과 비전을 제시하지 못하고 '기존 것을 지키자' 내지 '과거로 돌아가자'고 하는 진보는 더 이상 진보가 아닙니다.
보수의 관점에서 성장의 좋은 점만 강조할 필요도 없고 거꾸로 진보의 관점에서 성장의 나쁜 점만 과장할 필요도 없다. 또 모든 문제를 신자유주의로 환원하는 것도 우스운 일이다. 사람들이 세계로 내포되는 과정이 확대되면서 참여와 기회뿐 아니라 동시에 새로운 불만과 배제의 가능성이 높아지는 것이다. 요컨대 신자유주의가 등장하면서 갑자기 사회적 배제가 사회적 통합을 대체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사회적 내포를 통해 사람들을 사회 내부로 흡수하는 통치 과정은 근대 이후 점점 확대되었으며, 그 과정에서 기회와 동시에 다시 배제와 차별의 위험도 불균등하게 생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