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진경·권해봄·권성민 PD
'마리텔' 제작진의 신작이다.
그것은 부채감의 표정이었다. 그것은 내 일이 아니다. 내가 맞은 총칼이 아니요, 내 가족이 흘린 피가 아니다. 그러나 눈을 감아버릴 수 없는 사람, 돌아서 떠날 수 없는 사람의 표정이다. 어제까지도 만난 적 없는 그저 타인의 싸움을 마음에 떠안은 사람의 표정이다. 결국 포장도로 위로 흐르는 피를 향해 차를 돌리는 표정이다. 내게 이 영화는 이 표정 하나로 남았다. 그런데, 이 표정 왠지 익숙하다. 영화 말고 어디서 봤던 것 같다. 그게 어디였을까 며칠을 더듬다가 최승호 선배의 〈공범자들〉 시사회를 찾았다. 그리고 발견했다. 여기였구나. 그 수많은 부채감의 표정들. MBC에서 내가 봤던 싸움의 표정들.
예술인과 언론인의 영역에는 다소 차이가 있지만, 그럼에도 '할리우드 텐'과 해직 언론인들은 닮았다. 불이익을 무릅쓰고 할 말을 하는 용기가 겹쳐 보이지만, 그 때문만은 아니다. 생계수단과 직업적 자부심을 빼앗기고, 부당한 소송으로 고생하는 상황들 역시 교차하지만, 또 그게 전부는 아니다. '할리우드 텐'과 해직 언론인 선배들의 교집합에 가슴이 가장 시큰했던 부분은, 영화가 세심하게 그려내고 있는 이들의 사생활이다. "학교에 낼 서류에 아빠 직업을 뭐라 쓰느냐" 묻는 말에 갑자기 막막했다는 어느 선배의 이야기가 머릿속에서 빙빙 돈다.
꽤 많은, 멘토를 자처하는 강사들이 청중들에게 '지금 나는 행복한가' 자문하라 부추기는 장면을 여러 번 보았다. 대답이 부정적이라면 하루 빨리 변화를 촉구하라는 거다. 그런 말을 듣노라면, 마치 삶의 목적을 '행복'으로 수렴하려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왜 사느냐는 질문에 마땅한 대답이 없을 땐, '행복하려고'라는 말은 그럭저럭 나쁘지 않은 선택지로 보인다. 많은 경우 이건 특별한 반론 없이 수용되는 구절이기도 하다. 하지만 행복하려고 산다는 말에 나는 별로 공감이 가질 않는다.
신념을 짊어진 목소리가 반드시 옳으리란 법은 없다. 하지만 목숨을 걸면서까지 하고자 하는 말이 무엇인지, 정상적인 창구는 어째서 없었는지를 돌아볼 만큼의 호소는 되어야하지 않을까. 2016년 한국의 눈에 이 영화는 어떻게 비칠까. 교도관들만 불쌍하다. 지가 선택해서 죽는 건데 뭐가 문제야. 익숙한 비아냥들이 벌써부터 귓전에 울리는 것만 같다. 아니 누군가 목숨을 걸고 호소하고 있다는 사실조차 알려지지 않을지도 모른다. 지금도 스스로의 안위를 버린 수많은 목소리들이 들리지 않고 있는 것처럼.
두 번이나 관람한 이 영화에서, 똑같이 설움을 울어낸 장면은 마지막 동주의 독백이었다. 이런 세상에 태어나, 시를 쓰고 싶은 것이, 시인이 되고 싶은 것이 부끄러워 견딜 수가 없다며 두 손 앞의 종이를 마음처럼 찢어내는 그 장면은 내 가슴도 비틀어 찢었다. 얼떨결에 얻은 PD란 이름 앞에, '해직'이란 이름까지 추가로 붙은 이후로는 만들게 되는 것들이 달라졌다. 공정하지 못한 언론에 대해, 고통받는 사람들에 대해, 민주주의에 대해, 옳고 그름에 대해 무언가를 만들고 말할 일이 많아졌다.
학교 실습실에 있는 장비는 6mm SD급 비디오 카메라였다.
광화문 광장 주변을 천천히 둘러보면 지금 쌓여가고 있는 세월을 볼 수 있다. 거기에는 단추 두 개 끄르고 여유를 즐기러 나온 사람들도 있지만, 소외된 그늘 속으로 내쳐진 사람들이 목소리를 높이기 위해서도 나와 있다. 단식 투쟁을 하는 이들과 저녁에 무슨 맛있는 걸 먹을까 고민하는 이들이 공존하는 곳이다. 외국인들이 사진을 찍고 한복체험을 하고 있는 한 편으로는, 집회를 열고, 서명을 받고, 후원을 요청한다. 이러한 모습들이 어떤 이들의 눈에는 몹시 거슬릴 수도 있고, 때로는 내 얼굴을 찌푸리게 만드는 목소리들도 당연히 만난다. 하지만 그게 광장이고, 광장은 그래야 한다. 세월이 쌓여가는 이 광장이 피맛골처럼, 청계천처럼, 누군가의 눈에 보기 좋은 것만 남지 않게 되길 바란다.
얼마 뒤 어느 종편 뉴스에서 전의경 부모와의 전화 인터뷰 화면에 아무런 맥락도 없이 이 사진을 삽입했고, 그 즉시 시위참여자들을 비난하고 싶어 하는 네티즌들은 이 장면을 더욱 교묘히 잘라내어 사실은 시위참여자가 아니라 해당 의경의 어머니였다는 내용의 글을 앞 다투어 퍼뜨리기 시작했다. 급기야는 사진의 주인공이 등장해 사실 왜곡을 중지할 것을 요구했고, 그의 주장이 사실인 것으로 확인되자마자 이들은 다시 그가 '알바노조' 소속이라는 개인정보를 찾아내어 '불순한' 세력으로 몰아붙이기 시작했다. 미담의 주인공이 순식간에 '불순분자'가 되어버린 것이다.
운전대만 잡으면 끼어드는 차를 향해 평소엔 하지도 않던 욕설을 쏟아놓는 것도 비슷한 맥락이다. 도로 위는 목숨이 달려있는 곳이니까 그만큼 민감한 거라고 말 하지만, 실은 눈앞에 보이는 것이 사람이 아니라 차라서 더 쉬워질 뿐이다. 비인간화는 그렇게 사람이 보이지 않으면, 혹은 다른 인종 다른 언어를 향해 더 수월해진다. 자기 나라에서는 제아무리 학식이 뛰어난 외국인도, 더듬거리는 한국말로 말하고 있으면 그저 귀여워 보일 뿐이다. 제국주의를 그린 수많은 영화들 속에서,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로 떠드는 원주민들이 주인공의 눈에는 낯선 동물과 다를 바 없는 것도 그 때문이다.
덕분에 역사교과서를 바꾸고 싶어 안달이 난 대통령의 마음이 이해는 간다. 고작 작은 식당 하나 제대로 운영하지 못했다는 몇 줄의 글에도 생채기가 나는데, 민주주의를 망가뜨린 독재자로 서술된 아버지를 볼 때마다 얼마나 속이 끓고 밤잠을 설쳤을까. 그러나 그와 내가 결정적으로 다른 한 가지가 있다면 나는 네이버 댓글을 지워달라고 요청할 힘이 없고, 그는 교과서를 바꾸라고 명령할 권력이 있다는 것이다. 실제 법적으로 그럴 자격이 있는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그는 어마어마한 예산을 들여 그렇게 하고 있다.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실제를 뛰어넘는 그래픽을 구현할 수 있는데, 왜 꼭 '사람'은 <토이스토리> 때보다 썩 발전하지 않은 수준으로 묘사하는 걸까. '라일리'를 비롯한 <인사이드 아웃>의 '인간' 등장인물들을 보고 있으면, 머리카락이나 옷의 질감은 놀라울 정도로 현실적인데 반해 신체 비율과 이목구비, 피부의 질감 등은 <심슨>과 비교해도 별로 월등하지 않은 현실감을 보여준다. 털이니 인형이니 하는 소재의 질감에는 무시무시할 정도의 노력을 들여가며 과시용 캐릭터를 만들어 왔으면서, 가장 중요한 감정이입의 대상인 '인간'에게 만큼은 어째서 이렇게 기술력을 아끼는 걸까. 여기서 '불쾌한 골짜기'라는 이론이 등장한다.
상대적으로 가게의 입지도 공간도 덜 쓰게 되는 치킨집 사장님들은 퇴직금 위에 얹은 대출금으로 끓인 기름에 닭을 튀기고 있는 게 대부분일 테다. 먹는 사람보다는, 파는 사람의 삶을 건 소울푸드. 노동개혁을 하겠다고 한다. 이제는 회사에서 내보낼 때, 대출금 보태서 치킨집이라도 차릴 그 퇴직금마저도 줄여보겠다는 이야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