흥선대원군부터 노래방 추가시간까지, 온갖 이야기가 쏟아졌다.
신자유주의는 자유시장에 AI를 진입시켜 활성화를 도모할 수 있다는 데 고무될 것이고, 경제적 공리주의 역시 시장 전체의 파이를 키우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으로 여겨서 이를 반기는 낙관론의 입장에 서게 될 것이다. 결국 AI 통제권을 갖는 자본에게는 일방적으로 유리하고, 창조적 영역에서 비켜선 노동자 대다수는 불리한 위치에 놓일 것이 뻔하다. 이런 지형에서는 사회주의적 접근이 보다 유효할 것으로 판단된다. 일자리를 빼앗긴 노동자들에게도 그 필요에 따른 충족을 채워줄 수 있기 때문이다. 대표적으로 기본소득을 포함한 보편적 복지정책을 펼치는 데 유리할 수 있다.
나는 벤담의 공리주의자는 아니다. 하지만 고색창연한 도덕이나 설익은 정의를 외치기보다는 개인의 구체적인 행복을 말하는 것이 정치의 도리라는 데는 동의한다. 행복이 추상적이면, 권력자의 도덕이나 정의 타령과 다를 바 없다. 행복은 벤담의 '침대의 기록'만큼 구체적이어야 한다. 그리고 루쉰의 희망은 그 자체로 정의되지 않는다. 절망과의 끊임없는 싸움일 뿐이다. 따라서 희망이란 싸우는 자만이 내뱉을 수 있는 말이다. 아마도 새해가 희망인 것은 또 다른 싸움의 시간이 우리에게 다가오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대중정당은 다양성이 중요하다. 다양성은 민주적 정당과 창조적 정당의 원천이다. 다시 말해, 민주적 정당은 존경 받는 정당의, 창조적 정당은 유능한 정당의 필수요소다. 다양성을 잃어버린 당론결정은 민주라는 이름으로 독재를 하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
혐오표현은 자정에 맡길 수 있는 문제도 아니다. 소수자의 사회적 힘이 충분하다면 혐오표현은 얼빠진 사람이나 하는 실없는 소리로 전락한다. 이 정도라면 국가가 굳이 나설 필요가 없다. 그런데 역사적으로 소수자가 '자연스럽게' 강력한 힘을 갖게 된 사례는 찾아볼 수 없다. 현실적으로도 소수자에게 '맞받아치면 되는 거 아니냐' '무시하면 된다'는 조언은 한가한 이야기일 뿐이다. 우리가 인권보호를 위한 공적 개입을 주저하지 않는 이유는, 인권은 그렇게 '자정'에 맡긴다고 해결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니기 때문임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제도가 빗나가면 많은 구체적 삶들이 고단해진다. 제도의 파급력은 광범위하고 무차별적이어서 그것이 체계적으로 양산하는 고통의 규모는 사적인 연민이나 자선만으로는 도저히 감당해 낼 수 없다. 정말 심각한 일은 왕왕 제도(혹은 그 부재)가 개인들의 심성 자체를 타락시켜 집단적으로 죄의식을 마비시킨다는 점이다. 가령 국가가 노예제를 허용하면, 사람들은 인간을 소유하고 매매하면서도 아무런 가책을 느끼지 못하며, 히틀러체제하에서는 수많은 기독교도를 포함한 독일 중산층 사람들이 대거 잔혹한 인종정책에 기꺼이 앞장섰다. 토지공개념이 제도화되지 않으면 땅 투기는 매우 유용한 재태크가 될 것이며, 사유재산이 가장 우선적 가치로 신성시되는 사회에서 노동의 경영참여는 천부당만부당한 요구일 뿐이다.
분노가 작가를 만든다. 작가 디킨스의 분노의 대상은 사회였다. 부모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불행한 아이지만 부모를 탓할 수 없는 분노가 사회제도에 과녁이 맞추어져 있다. 셰익스피어와 마찬가지로 디킨스도 정규교육은 짧았지만 독자적인 노력을 통해 지식과 경험의 축적에 정진했다. 또한 그는 작가로서의 전 생애를 통해 강한 실험정신에 충만했다. 어떤 주제는 작품 속에 반복하여 제시되면서 깊이와 세련미가 더해지고 사회문제에 대한 날카로운 성찰을 담아내었다.
공자의 아내에게 친구들이 걱정을 늘어놓았다. "당신 남편은 천하의 대학자인데 부부 생활은 제대로 하는가"라고 은근히 놀리는 기색이 역력했다. 말인즉 공자 같은 저명한 학자는 책만 보고 공부만 하지 어디 부부 생활 따위를 하겠는가, 라는 말이다. 그 말을 들은 공자의 부인은 즉각 이렇게 대답했다. "아니 이 사람들아. 공자가 어디 배꼽 위의 공자이지 배꼽 아래의 공자이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