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동 성범죄는 증가하는 추세다.
신경숙과 문학권력에 대한 비판을 극단적으로 정형화시켜 놓고, 그 논리에 문제가 있다면서 창비의 입장을 정당화하는 것은 설득력도 없고 아름답지도 않습니다. 당신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비판자들은 훨씬 다양한 입장을 가지고 있습니다. 저만 해도 이응준 소설가가 신경숙 표절을 지적하던 바로 그날 페이스북 댓글에 "이 글로 신경숙 작가의 수작까지 매도할 필요는 없지만, 저는 당연히 표절이라고 생각하고 이에 대한 분명한 문제제기가 필요하다고 봅니다."라고 쓴 바 있습니다. 이런 입장이 김종엽 편집위원의 주장대로 신경숙 "작품 전체를 쓰레기"로 보는 건지 묻고 싶습니다. 창비가 이러한 프레임을 깨지 않는 한 어떤 생산적인 논의도 이루어지기 힘들 겁니다.
이렇게 말씀드리고 싶네요. 남자 지식인들의 버릇이 잘못 들어 있습니다. 맥락에 따라서 여자뿐 아니라 남자도 성차별을 당할 수 있다는 식의 상대주의적 논변이 득세한 탓에, 정작 남자 지식인들은 페미니즘에 대해 지식을 달달 외울지언정 그것이 자기 자신의 문제라고 인식하는 능력을 상실해버린 것 같습니다. 엠마 왓슨과 말랄라 유사프자이는 여성이고, 두 사람 모두 2015년 현재를 대변하는 페미니즘의 아이콘입니다. 고종석 선생님께서 말랄라 유사프자이의 사례를 들어 엠마 왓슨을 가르치신다고요? 이건 부산 사람이 광주 사람더러 목포 사람보다 너는 덜 차별당한다 운운하며 호남차별에 대해 일장 연설을 늘어놓는 꼴입니다.
정치인이나 논객의 인기는 반대편을 조롱하거나 아프게 만드는 언어를 잘 구사할 수 있는 능력에 의해 결정된다. 지지자들의 환호를 실시간으로 확인할 수 있는 디지털 시대의 논쟁이란 상처를 주고받는 게임이다. 언젠가 고종석이 잘 지적했듯이, 그런 게임에선 아픔을 느끼는 능력이 가장 모자란 사람이 최후의 승자가 된다. 그런데 흥미로운 건 그런 사람들은 대부분 일상적 삶에선 더할 나위 없이 선량하고 순수하다는 점이다. 이에 관한 수많은 증언들이 있어서 하는 말이다. 순수와 정치의 만남이 문제인 걸까? 그렇다면 그 이유는 무엇일까?
짜장면 배달부의 고뇌는 많은 이들의 삶에서 반복된다. "부르기 전에 도착할 수도 없고, 부름을 받고 달려가면 이미 늦었다." 우리는 기다림을 말하는 데 익숙하다. 그것은 살아가는 일의 어떠함을 전하는 오래된 지혜의 차원일 수도 있고, 역사의 정의를 믿고 나누고자 하는 화법일 수도 있다. 그러나 실제 우리가 감당해야 하는 것은 기다림이라기보다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곤경일 때가 많다. '제시간'은 대개 우리의 것이 아니다.
최근 우리는 새로운 단계에 직면했다. 최근 몇 년 가장 빈번하게 수면위로 올라오는 문제의 용어들은 양상이 완전히 다르다. 소위 말하는 '혐오 언어'들이다. 지금까지 우리가 살펴본 '정치적으로 올바른 용어 사용'이 잘 모르고 습관처럼 사용하던 일상어에서 왜곡된 부분을 바로잡는 행위였다면, 혐오 단어들은 조어의 목적 자체가 '현실의 왜곡'이다. '설라디언'이라는 단어가 그 좋은 예다. 부산대학교 맞춤법 검사기에 따르면 '서울에 사는 전라도 사람'을 뜻하는 말이다. 그런데 우리가 이런 단어를 만들어 전라도 출신의 서울 사람을 구분할 필요를 느껴서 이런 단어가 생겼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