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무부 장관직 사퇴 의사가 없음을 분명히 밝힌 추미애 장관.
영리병원의 정치가 성공할수록 큰 정치는 실패하니 문제다.
“무조건 한국당? 지금은 안그렇십니다"
왜 속칭 '폴리페서'들이 유독 한국에서 판을 치는가? 한국 학계에서 국가권력은 견제의 대상이라기보다는 너무나 친근한 유착의 대상이기 때문이다. 이미 사회 귀족이 된 소위 '명문대'의 전임교수들은 정치·행정 엘리트들과의 네트워킹을 떠나서 존재할 수 없다.
촛불정국으로 드러난 시민들의 자각과 엄중한 요구에 비해 경제시스템이나 재벌체제를 근본적으로 개혁할 수 있는 실제 조건이나 상황은 녹록지 않다. 삼성물산 합병을 도왔던 보건복지부나 공정거래위원회가 보여주었듯 거대 경제권력에 포획된 정부와 관료, 재벌체제로부터 이득을 챙겨온 기득권세력과 이재용체제를 만든 공모자들의 조직적 반발이 그런 경우이다.
최순실 의혹에 대한 고발이 접수됐지만 검찰은 한 달간 꿈쩍하지 않았다. 미르·K스포츠재단 인허가 과정을 감사해야 할 감사원도, 최씨 일가 탈세 의혹을 조사해야 할 국세청도 움직이지 않았다. 다들 대통령의 입만 바라보고 있었다. "이게 나라냐"는 물음은 대통령과 최씨뿐 아니라 국가기관 모두를 향하고 있다. 문제는 오히려 비정상적인 일들이 놀랄 만큼 잘 돌아간 데 있었다.
지금껏 역대 선거에서 겉으로 보기에 그럴 듯한 정책안과 미래비전을 내세우지 않은 후보나 정당은 없었다. 하지만 한두 번의 예외가 있긴 했지만 번번이 립 서비스로 끝났다. 후보와 정당의 진정한 목소리가 아니라 빌려온 것이었고, 당선 이후 오리발을 내밀었다. 진보당에서 한겨레당, 민중당, 국민승리21로 이어지는 범진보 혁신정당에서 애써 기획하고 정리한 내용을 베껴서 변조한 것이 대부분이었다. 가까운 예로 복지 확대와 경제민주화의 담론이 그렇다. 관심 있는 시민이라면 누구나 기억하고 있다.
아다 콜라우(Ada Colau)는 바르셀로나 시장으로 2015년 당선되었습니다. 올해 만 42세인 아다 콜라우 시장은, 2008년 세계 금융위기 이후 주택대출금을 갚지 못해 집에서 쫓겨나는 시민들과 함께 '주택담보대출 피해자를 위한 플랫폼(PAH)'을 만들었던 풀뿌리 시민활동가 출신입니다. PAH에서 활동하던 아다 콜라우는 2013년 집에서 강제로 쫓겨날 위기에 처한 사람들과 함께 바르셀로나 경찰에 연행되었습니다. 그리고 아다 콜라우는 2년 뒤 자신을 연행했던 바르셀로나 경찰을 지휘하는 시장이 되었습니다.
청와대와 전경련의 어버이연합 개입 의혹이 악성인 이유는 여론이 왜곡됐기 때문만이 아니다. 의혹이 사실이라면 피해자들의 절규를 정치권력과 경제권력이 막으려 한 것이다. 피해자들의 눈물에 가래침을 뱉은 것이다. 가습기 살균제, 청부살인, 위안부, 세월호.... 이름은 다르지만 본질은 하나다. 피해자들이 조용히 기다리지 않는다고, 떼쓴다고, 나라 생각할 줄 모른다고, 무시하고 타박하고 눈 흘기는 것. 피해자들이 비난받고 외면당하는, 그런 사회에서 재앙은 무한 반복될 뿐이다.
크고 작은 모든 권력 중에 선출직의 권력만을 민주주의적 1인 1표로 구성하고 교체한다. 다른 권력은 보통사람들의 1인 1표와는 아무 상관없이 성립하고 유지되며 사라진다. 보통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칠 뿐 영향을 받지 않는 권력들이다. 재벌과 사용자의 권력이 그렇고 관료와 검찰, 판사의 권력이 그러하며 학자와 전문가, 문화예술인의 권력도 같다.
등단 2년 후인 1988년 정부는 월북문인들의 작품을 공식적으로 읽을 수 있도록 금서에서 해제하였다. 88올림픽대회를 앞두고 국제여론을 의식한 정치권력의 정치적 결단이었다. 이를 계기로 영인본으로 찔끔찔끔 만났던 임화와 백석과 오장환과 이용악과 박세영의 시를 시집으로 보게 되었고, 그동안 내가 배운 현대문학사가 반쪽도 안되었음을 깨달았다. 임화의 시 「우리 오빠와 화로」나 「네거리의 순이」를 읽어가면서 울컥하기도 했다. 나는 과문한 탓으로 이런 선배 시인들을 일찍 만나지 못한 것을 오랫동안 아쉬워했다.
박근혜정부가 청년층에 대해서 특별한 대책을 내놓고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청년이라는 사회적 약자 집단을 이용해서 노동 내부의 갈등을 불러일으키는 방식으로 임하고 있다. 이러한 정부의 갈등유발 전략에 조직노동과 미조직노동, 청년들이 총단결하여 대응해야 한다는 주장이 큰 설득력을 가지지 못하는 것은 안타깝지만 분명한 현실이다. 이는 다수의 청년들이 한국의 조직노동과 진보진영을 자신의 삶을 대변하는 집단으로 인식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마도 박근혜정부 역시 이런 상황을 정확하게 예측했을 것이다. 결국 진보진영이 내세웠던 청년 비정규직 문제의 상징인 '장그래'가 부메랑이 되어 돌아온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