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희숙 야당 의원을 비판하려다 역풍을 맞았다.
공유경제는 그저 저성장 시대, 공급이 수요를 초과하는 시대에 적합하게 설계된 자본주의일 뿐이다. 그럼에도 분명한 것은 선한 결과를 불러올 때가 잦다는 사실이다. 물론 그렇지 않을 때도 있겠지만, 의도했던 것이 아닌데도 선한 결과를 가져오는 이유는 뭘까.
마치 '스트리밍'처럼 트렌드가 빠르게 변화하는 도시의 사람들에게 소유권은 구시대의 유물일 뿐일지 모른다. 남의 것을 손쉽게 빌려 쓸 수 있는 시대가 되었다는 뜻은 굳이 무언가를 소유하지 않아도 불편하지 않은 시대라고도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장기적 관점에서 보면 공평한 분배가 사회적 자본의 축적을 돕고 그 결과 성장이 촉진되는 결과가 빚어지게 됩니다. 다시 말해 장기적 관점에서 볼 때 공평한 분배의 추구가 성장을 저해하기는커녕 오히려 성장을 촉진시키는 요인이 될 수 있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애당초 성장이 우선되어야 하느냐 아니면 분배가 우선되어야 하느냐의 논쟁을 벌일 필요조차 없었을지도 모릅니다. 이와 같은 논쟁은 성장과 분배가 서로 충돌하는 목표라는 전제하에서만 의미가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도시 소비자들에게 삼나물, 어름을 물어보면 맛은 고사하고 이름도 처음 듣는다고 답한다. 심지어 젊은 사람들은 아욱, 근대, 머위 등도 거의 모른다. 맛 보려는 시도도 거의 안 하는 것 같다. 식생활 문화가 패스트푸드, 정크푸드에 길들여지다 보니 이러한 식재료들에 관심을 가질 기회가 없는 게 당연하다. 소비자들의 이런 식습관에 맞춰 유통회사들은 소비자 기호에 맞는 품목만 선택해 구매하게 되고, 농민들은 인기 없는 작물의 재배를 기피하게 되고, 결국 그 종자는 잊히고 사라지게 되는 것이다.
보수의 관점에서 성장의 좋은 점만 강조할 필요도 없고 거꾸로 진보의 관점에서 성장의 나쁜 점만 과장할 필요도 없다. 또 모든 문제를 신자유주의로 환원하는 것도 우스운 일이다. 사람들이 세계로 내포되는 과정이 확대되면서 참여와 기회뿐 아니라 동시에 새로운 불만과 배제의 가능성이 높아지는 것이다. 요컨대 신자유주의가 등장하면서 갑자기 사회적 배제가 사회적 통합을 대체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사회적 내포를 통해 사람들을 사회 내부로 흡수하는 통치 과정은 근대 이후 점점 확대되었으며, 그 과정에서 기회와 동시에 다시 배제와 차별의 위험도 불균등하게 생긴다.